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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전쟁과 시위, 그리고 기자

유희준 SBS기자  2003.04.02 1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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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준 SBS 보도제작2부 기자



전쟁은 인간의 삶을 순식간에 참혹하고 비참하게 바꿔놓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라크 사람들이 전쟁이 불러온 공포와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반 단기전 양상을 보이던 전쟁이 결국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무고한 바그다드 시민들의 고통과 신음소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 국제사회의 동의 없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가 세계에서 과연 얼마나 될까? 부시가 지칭한 ‘악의 축’에 속하는 국가들 외에 미국처럼 일방적으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국제사회와 세계여론을 무시한 채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 전쟁을 보면서 인간 사회에서 평화는 과연 이상에 불과한 것인지 새삼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비이성적인 사태를 좀 더 객관적으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CNN을 비롯한 일부 언론의 모습에서 자괴감이 느껴진다.

출근 혹은 퇴근 길, 매일 회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그들은 자회사 해고 노동자들이다. 그들의 요구사항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취하하고 가압류를 해제하라는 것이다. 얼마 전 두산 중공업 파업사태에서 분신 자살한 고 배달호씨가 사용자측에 요구한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노조원을 상대로 한 손배소송이나 재산 가압류 조치는 이른바 신종 노조 탄압의 수단으로 최근 등장한 것이다. 일부 사주들의 이런 극단적인 조치들은 노동자들 시각에서 보면 무자비한 만행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사주 입장에서야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본사까지 찾아와 벌써 몇 달째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해고 노동자들의 입장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봤는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객관적으로 현실을 바라봐야 하는 기자 입장에서 보면 해고 노동자들의 시선 속에서 그저 기관이나 단체 혹은 다른 사람들의 잘잘못만 비판해 온 과거가 오히려 부끄럽게 느껴지고 만다. 기자는 부조리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상을 지향한다. 현실이 조금 더 이상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적 공기(公器) 역할을 기자가 해야 한다. 그저 남들 얘기나 기관의 입바른 말들만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게 기자의 사명은 아닐 것이다. 또 부끄러운 현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비판하면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좀 더 나은현실의 모습과 이상을 제시하는 역할까지 기자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자는 항상 바쁠 수밖에 없고 현실 속에 살지만 이상주의자가 되야 한다고 믿고 있다. 전쟁과 시위가 터지면 더욱 바빠지는 기자들. 이라크 전장에 파견된 동료와 선후배 기자들에게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격려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