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의 속성이나 문제점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것에 어떤 변화가 개입될 때다. 예를 들어 결혼은 그것이 잘 유지될 때는 그 차별성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혼의 위기가 닥치면 법률에 의해서든 관습에 의해서든 얼마나 아내가 불리한 위치에 서 있는지, 철석같이 믿었던 모자관계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당장 드러나게 된다.
이 같은 점은 어떤 집단의 경우에도 별로 다르지 않다. 한국 축구계가 지니고 있던 문제점은 히딩크라는 전혀 이질적인 존재가 개입함으로써 비로소 명약관화하게 폭로됐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요즘 한국 언론계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도올 김용옥이란 존재를 통해서.
지난해 말 언론계에 입문한 도올은 불과 수개월만에 어떤 의미로든 가장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기자로 부상했다. 전통적 기자문법에서 벗어난 그의 글들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분명한 시각과 주장으로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그가 이런 지위를 차지하게 된 데는 원래 그가 가지고 있는 높은 지명도와 대중의 관심 외에도 문화일보가 제공한 파격적 특권-엄청난 지면 할당과 마음대로 글 쓸 자유 등-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문화일보, 더 크게는 한국언론이 그에게 그 같은 특권을 허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언론의 취약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기자로 입문하기 전 도올은 방송강연을 통해 ‘무식한 기자들’을 비난했다. 그리고 기자에 입문하면서 ‘언론 밖에서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들어가 일하면서 변화를 선도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한 마디로 기존 언론계를 ‘싸그리’ 무시하면서 던진 도전장이었다. 지난 시절 약 10년간 기자라는 직업으로 살았던 사람으로서 나는 기대와 함께 그의 도전이 얼마나 성공할지 궁금했다. 아무리 현재 한국언론이 만신창이라 해도 제4부라고 불리는 언론계가 그렇게 만만할까? 그가 혹독한 훈련과정을 견뎌내고 정말 기자로도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훈련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곧바로 기존 질서와 규범과 관행을 깡그리 무시하고, 너무나 넓어 눈이 아플 지경인 지면 위에서 ‘꼴리는 대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지면의 사유화’ 현상까지 보일 정도다. 이런 점에서 한국언론계는그에게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학업과정을 요구한 한의과 대학만도 못한 수준이다. 도올은 스스로 털어놨듯 ‘수모’를 당하며 한의학계의 체제에 순응해야 했지만 한국 언론은 경쟁적으로 그를 모셔와 ‘멋대로 특권’을 허락하며 수모를 자처했다.
도올 기자를 통해 본 한국의 언론계는 너무도 무력하다. 도올 스스로 기자로서 가다듬게 만들 언론무림의 고수는 커녕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도 별로 감지되지 않는다. 자신감과 자존심이 사라진 곳에 대중주의 상업주의만이 판치고 있다.
잃어버린 자신감과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 그 길은 언론개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한 일이겠지만 언론사들이 독자들의 신뢰를 얻고 기자들이 직업윤리와 능력을 겸비한 전문인으로서 존경받기 위해서는 기자들 스스로부터 개혁에 뛰어들기 바란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도 월터 리프먼이나 제임스 레스턴 같은 언론인이 있었다면 도올 기자의 지면은 지금보다 훨씬 겸손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