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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 규명 언론 무관심 여전

이창수 위원장 특별법 제정 요구

박주선 기자  2003.04.09 14: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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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AP통신이나 BBC에 보도자료를 보내는 게 낫겠어요. 외신에 나면 우리 언론이 열심히 보도하잖아요.”

지난 4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만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이창수 집행위원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제정을 위한 철야농성 37일째. 지난 1일 투쟁 장소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여의도로 옮겼다. 철야농성을 벌인지 한 달, 매주 두 세 차례 보도자료를 보내고 있지만 언론은 너무 멀리 있다. 지난달 31일 한겨레가 이 위원장 인터뷰를, MBC, KBS 등이 농성소식을 단신으로 전한 정도다.

“민간인 학살 문제는 과거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문제죠. 50년이 넘게 ‘빨갱이’로 몰렸고, 정신병자로 살거나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어요. 언론도 힘없는 사람들의 얘기에는 귀기울이지 않아요.”

범국민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미군, 국군,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수를 전국 100여곳, 100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유가족은 500만명, 남한 인구의 약 10%에 해당한다.

“거창 사건, 제주 4·3사건 특별법은 특정 지역의 문제에 국한되기 때문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선 통합특별법이 필요해요. 하지만 2001년 9월 여야의원 47명이 특별법을 발의한 이후 심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언론의 관심은 더욱 절실하다. 이 위원장은 “언론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면서도 “그래도 기댈 곳은 언론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 중앙 언론은 통합특별법 제정에 관심이 없다. 그나마 2001년 6월 대한매일과 한겨레가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민간인학살조사 특별법 제정하라’는 사설을 각각 내보냈다. 문화일보가 같은 해 9월 기획시리즈를 통해 통합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학살 피해자들의 입장을 전했고, 지난해 국민일보가 한국전쟁 중 부산형무소 제소자 학살 사건을 보도하면서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환기시킨 정도다.

더 나아가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국내 언론의 탐사보도는 찾기 힘들다. 99년 AP통신, 2002년 BBC가 노근리 학살 문제를 타전했을 때 받아쓰기 바빴던 대다수 언론들이 자괴감을 느낀 이유도 그 때문이다. 89년 ‘말’의 산청 함평 학살사건 보도를 시작으로 시사저널, 한겨레, 제민일보, 경남도민일보, 부산일보, 해남신문,경산향토신문 등이 관련 문제를 다뤘으나 대다수 중앙 언론은 타사 보도에 냉담했고, 단발성으로 사건을 취급하는 정도에 그쳤다.

가해자의 증언이나 공문서를 찾기 힘들고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의 공격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이중삼중고로 다가온다. 그래도 보도 이유는 있다. 민간인 학살 문제와 관련,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자치행정부 부장은 “취재의 어려움은 둘째치고 안팎에서 밀려오는 회유와 압력이 부담스럽다”면서도 “불합리한 현대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덮어두면 미래가 있겠느냐”고 말한다. 오유석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 교수는 “민간인 학살 문제를 단순히 이데올로기 차원이 아닌 ‘사람’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며 “잘못된 역사에 침묵하는 것은 언론 본연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무기한 농성을 벌일 것이냐고 묻자 이창수 위원장은 대답한다. “무기한이 아니라 부정기한입니다. 통합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만 할 것이니까요. 내년에 총선이 있으니 올해를 넘기면 특별법안은 자동 폐기될 가능성이 높아요. 정치권에 대한 언론의 압박이 절실합니다.”

박주선 기자 sun@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