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론적’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논쟁의 과정에서, 특히 이해당사자가 논쟁의 주체로 참여한 경우에는, 지극히 기초적 사실마저 부정하는 논거가 제기되기도 한다. 누군가가 ‘원론’을 상기시키는 악역을 맡아야 한다. 신문 공동배달제에 대한 최근 논의도 그렇다. 이창동 문화부 장관이 언급한 정부 지원 가능성에 대해 조선과 동아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모든 국가 정책에는 이익을 얻는 쪽과 손해 보는 쪽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해관계에 따라 반대 혹은 찬성 입장을 가질 수 있다. 단지, 입장 표명 수단이 사고(社告) 혹은 성명서가 아니라 보도, 해설 및 논평이었다는 점이 독자들을 씁쓸하게 만들 따름이다.
문제는 반대의 논거다. 시장경쟁에 의해 작동되는 언론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것이 원칙을 말하는 것이라면, 틀린 주장이다. 국가는 언론에 개입할 수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개입해야 한다. 국가는 언론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되지만, 동시에 언론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적극적 의무가 있다. ‘불개입 원칙’이나 ‘강력한 제도적 규제’ 어느 것도 원칙적인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판단이다. 그에 따라 국가가 언론에 개입하는 방식과 정도가 결정돼야 한다.
현실은 어떤가. 신문시장을 놓고 본다면, 동아 중앙 조선의 과점 정도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이다. 광고주협회의 2001년 조사를 근거로 추정하면, 전국 및 지방 종합일간지를 구독하는 가구 중에서 3개 신문 구독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70% 정도다. 세계신문협회 2002년 보고서를 바탕으로 계산해보면, 미국 전체 일간지 발행 부수에서 3대 신문이 차지하는 비율이 9.7%이다. 일본의 경우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규모인 1000만부 이상 발행하는 요미우리와 아사히를 포함한 3대 신문이 전체 일간지 발행 부수에서 49.5%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 신문시장의 과점 수준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 비하면 아주 예외적 상황이다. 한국의 과점 정도는 이 보다도 더 높아 민주국가로서 견디기 힘든 정도다.
과점 정도가 더 큰 방송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방송과 신문에 대한 규제 원칙을 간과한 것이다. 한국 방송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며거기에는 중앙 3사의 과점도 포함된다. 하지만 방송의 경우 전통적으로 독점 혹은 과점을 전제로 방송 허가를 비롯해서 방송사 조직과 내용을 규제해왔다. 이 원칙, 즉 내적 다양성의 원칙은 한국에서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신문과 방송의 단순 비교는 적절치 않다.
신문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외적 다양성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개별 신문은 편향적이라도 많은 신문들이 전체적으로는 다양성을 보장하기 때문에 특별한 규제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점은 이 원칙의 전제를 무너뜨린다. 법적으로 신문의 소유구조나 심지어 시장점유율을 제한하자는 요구가 제기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 국가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이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국가권력을 오용할 것이라는 의심이 민주주의 제도의 기본 요소에 속한다. 따라서 언론활동에 대한 억압적 규제는 그 활동이 자유로운 여론형성을 해치는 중대한 원인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정당성을 확보한다. 추정이나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일반적 인식만으로는 재산권 사용이나 언론사와 언론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하지만 법정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의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새 정부가 ‘언론개혁’의 본질보다는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린다는 비판은 국가 미디어 정책의 이러한 한계를 간과한 것이다. 정부가 ‘언론개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주장은 책임회피를 위한 전략이기보다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려는 태도로 이해돼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공배제에 대한 국가 지원은 억압적 규제가 아니라 진흥적 정책이다. 이 정책이 설사 결과적으로 시장지배적 신문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정당성을 갖는다. 아예 그런 신문사를 수혜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도 가능하다. 문제는 효용성이다. 그에 대한 보다 치밀한 조사와 논의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