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개혁의 키워드는 ‘과거 청산’과 ‘변화를 수용할 민주적 시스템 구축’으로 집약된다. KBS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돼온 굴절된 역사에서 기인한 권위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조직 병폐다. “상층부 구성이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지 않은 사람들로 채워지면서 눈치보기의 사슬이 조직을 광범위하게 옭아매고 결국 민주적 의사소통이 단절됐다”는 KBS 한 PD의 말은 KBS 내부의 심각한 조직 문화를 실감케 한다. “정권 입맛에 맞게 굴러온 관행이 점차 단단하게 굳어졌고 오랫동안 축적돼 경향성으로 자리잡았다”는 KBS 기자의 자조섞인 말에서도 알 수 있듯 간부들의 ‘눈치보기’는 자발적인 의사소통을 가로막아 폐쇄적인 조직 풍토를 만들었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문화와 시스템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제대로된 좋은 프로그램과 뉴스를 제작하는 데 치명적인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와 관련 정연주 KBS 사장은 지난달 29일 기자간담회에서 “KBS 토론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준비 과정이 느슨하고 관료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KBS 개혁의 성패는 오랫동안 고여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능력있는 인사를 발탁하는 과감한 ‘인적 쇄신’에 달려있는 셈이다.
KBS 사장의 ‘제왕적 권력’, 회사 지도부의 독점적인 의사 결정, 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 문화는 인사제도를 투명하고 개혁적으로 정비하고 현업중심의 조직개편 등 ‘밑으로’ 권력을 분산하며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의견을 적극 수렴하는 사내 민주적 시스템을 정착시킬 때 비로소 바뀔 수 있다. 물론 과감한 인적 쇄신이 개혁의 첫 단초이지만 개혁과 변화를 실질적으로 수용할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지속적인 추동력과 실천력을 담보할 수 없다. KBS 노조 이훈희 정책실장은 “과감한 인적 쇄신이 끝나면 KBS의 변화에 적합하고, 또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에 노조를 비롯한 직원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사장도 취임 직전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개혁은 혼자서 하는게 아니라 KBS 직원들과 시스템이 하는 것”임을강조하기도 했다.
“박권상 체제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말처럼 박 사장 시절의 문제점과 한계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5년 전 KBS 개혁에 대한 기대 속에 출범했던 박권상 사장은 재임 기간 동안 ‘독선적 의사결정’ ‘자유주의적 독재’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간부 구성은 지연과 학연 등 사적인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고 각종 시스템 개선과 사내 민주화 조치도 ‘민주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기계적 중립성’이란 비판처럼 사회적 의제 설정 기능은 크게 약화됐고, 제작과 보도에 있어서의 간부들 철학도 ‘현실 안주’ ‘기계적 중립’으로 굳어져갔다는 내부 자성이 쏟아졌다. 보도국 한 기자는 “KBS가 깨뜨려야 할 보수적 조직 문화와 이미지를 전혀 바꾸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KBS 내부의 관료적인 조직 문화를 바꾸고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제작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결국 ‘공영방송의 제자리 찾기’로 귀결된다. 그리고 공영방송의 올바른 모습은 프로그램의 공공성으로 구현된다. 정 사장이 KBS의 기본 방향과 성격을 “건강한 정보와 오락을 제공하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공공재”라며 “공공성을 강화하겠다”고 천명한 만큼 프로그램에 대한 실질적인 개혁 조치는 필수적이다. 매체비평과 개혁프로그램 신설은 공영방송의 ‘맏형’이라는 KBS로서는 한참 늦은 감이 있다.
KBS의 정치적 독립성 확보도 중요한 과제다. KBS 보도국에서 최근 시청자 12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9%가 ‘KBS 뉴스가 독립적이지 않다’고 답변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와 관련 정 사장은 “조직의 책임자는 어떤 종류의 외풍도 막아내야 한다”며 “정치적인 것이든 어떤 이익집단의 압력이든 막아낼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KBS 내부에서는 각 실국별로 자체 개혁방안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KBS 노조는 이같은 일선 직원들의 목소리를 모아 ‘10대 개혁과제’를 제시했다. △과감한 인적쇄신을 통한 사풍개혁 △인사제도 개편 △보도·제작 자율성 확보를 위한 시스템 개혁 △공정방송을 위한 제도적 장치 내실화 △새로운 편성규약 제정 △프로그램 개혁 △2TV 정체성 확립 △현업중심의 조직개편 △DTV 전송방식 변경 △지역국 활성화 등이다. KBS 노조는 10대 과제를 발표하면서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진정한 공영방송, 시청자 주권과 사회적의제설정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KBS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