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되고 난 뒤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기자가 됐냐”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초년기자 시절엔 사회에 작은 공헌 어쩌고 하는 나름대로의 모범답안을 내놓곤 했다. 그때부터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이 질문을 받는다. 달력에 빨간 글씨가 새겨진 날 회사 가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 6살짜리 꼬마녀석이 불쑥 던지는 질문이다. 옆집 사람들은 휴가 때 해외여행 간다는 집사람의 푸념 속에 묻어 나오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근엔 공무원들과 어울려 ‘쏘주’ 한잔 먹을 수 없게 된 내 자신에게 스스로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상투적으로라도 말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기사실명제가 도입됐지만, 10여년 전에는 그런 게 없었다. 좋은 기사라고 생각되면 데스크가 기사 뒤에 이름을 특별히 붙여줬다. 지면에 이름 석자가 나오는 날은 “한건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다. 당시보다 2배 가량 늘어난 지면. 그러나 인적 구조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바다와 같은 지면을 메우려면 문제의식을 가진 기자가 아니라 속필가가 필요하다. 명품을 만들거나 기획할 시간도 없다. 공장에서 기사를 찍어내는 직공이며 불량률 줄이기에 심혈을 쏟을 뿐이다. 시장의 논리는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이렇게 나를 속박했다.
하긴 문제의식을 가진 기자를 이젠 별로 달가워하지도 않는 것 같다. 보도자료를 충실하게 쓰는 기자를 사회가 더 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힘을 가진 사람일수록, 정확하게 말하면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유통의 과정까지 통제하겠다고 나서는 것 같다. 결국 보도자료를 얼마나 충실하게 전달하느냐를 지켜보겠다는 것 아닌가. 이는 불신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어쩌다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모두 불신받는 처지가 됐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벼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세상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쁠 때가 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똑같은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더 큰 기쁨이다.
며칠 전 부서 메일로 독자의 편지가 전달됐다. 결론은 좋은 기사를 써 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다. 일면식도 없는사람이 보내온 감사의 편지였다. 그날 저녁 친구들과 소주를 마셨다. 한 녀석이 느닷없이 “넌 왜 기자를 하고 있냐”고 물어왔다. “우리 신문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 멍청아”라는 게 나의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