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의 ‘길재경 망명설’ 오보 소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씁쓸함을 금치 못하게 한다.
중앙일보의 길재경 묘비 사진 공개로 이틀만에 오보임이 밝혀지긴 했으나 이번 오보 소동은 ‘김일성 사망설 오보’ 이후 우리의 대북 인식 수준이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한 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기본적인 확인취재조차 하지 않은 채 첫 보도를 한 연합뉴스의 무모함, 이를 톱뉴스로 보도하며 북한지도부가 붕괴하고 있는 것 같다는 해설까지 덧붙인 TV 등 다른 언론의 과감함, 그의 사망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정부의 무지함 등이 그렇다.
연합뉴스는 19일 이번 오보에 대한 사과 사고를 통해 “관련 내용은 평소 신뢰를 쌓아온 취재원으로부터 본사 기자가 상세히 전해 듣고 작성했고, 북한관련 정부 부처의 확인과정을 거쳤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연합뉴스가 제대로 확인취재를 했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정부에서는 길재경의 사망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북한관련 정부 부처의 확인과정’이란 의미가 없다. 또 첫 보도에 앞서 길재경과 함께 망명한 것으로 알려졌던 한명철 북한 조광무역공사 부사장에 대한 확인취재만 했더라도 이번 오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합은 일단 망명설을 터뜨리고 난 다음에야 한명철과의 전화인터뷰를 시도했다. 결국 사전 확인취재를 하지 않은 셈이다. 보도의 ABC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길재경의 망명을 북한의 마약 밀매와 연관지은 연합의 첫 보도도 그렇지만 이를 북한 지도부의 붕괴 조짐으로 비약시킨 TV 등의 상상력은 고약하다 못해 추악하다. 이 정도의 사안을, 그것도 톱뉴스로 보도하려면 최소한 나름대로의 확인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방송사 등은 자체 기사가 아닌 연합 기사이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모른 체 할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사과를 해야 한다. 보도의 책임은 해당 언론사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한 북한전문가는 “총비서 서기실 부부장이라고 해서 권력 최측근은 아니다. 김정일의 현장지도를 수행하는 당과 군의 각 6∼7명 정도가 북한지도부의 진짜 권력 실세”라면서 “설사 길재경의 망명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북한지도부의 붕괴 조짐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런 식의 오보가 남북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이번 소동에서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면 이번처럼 터무니없는 오보의 재발을 반드시 방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번 오보의 생산과정이 구체적으로, 소상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연합측은 “취재원 보호를 위해 구체적인 취재경위와 과정은 밝히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 연합뉴스의 한 기자는 “망명설을 처음 발설한 ‘서울의 한 외교소식통’은 정보기관 쪽에 있는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북미문제에 정통한 한 재미 언론인은 “이번 오보의 배경에는 일련의 북한 고위인사 망명설을 통해 북한체제 붕괴를 기정사실화하려는 미 정보당국의 심리전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