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의 특성을 모르는 음악가가 좋은 연주를 할 수 없고, 연장을 모르는 목수가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미디어 전문직인 기자도 기본도구를 모르고는 좋은 기사를 쓸 수 없다. 기자의 도구는 글이나 말, 사진, 영상들이다. 이들을 총칭해서 ‘기호’라고 부른다. “기호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대신 의미해 주는 어떤 물리적 실체를 말한다.” 기호에 대한 학문인 기호학은 따라서 기자를 비롯한 미디어 종사자들에게 필수과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기자들이 ‘기호학’이란 말은 들어보았겠지만, 구체적 내용을 아는 기자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이 기자들만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기호학’은 그 명칭(semiotics)을 통일한 지 약 30년 밖에 되지 않은 신생학문으로, 학문적 정체성을 확립한 단계는 아니다. 철학, 문학, 사회과학 등 폭 넓은 영역에서 다양한 시각들이 기호학적 접근방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용어 또한 이론가나 맥락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어 헷갈리게 만든다. 그나마 관심을 가진 기자들에게도, ‘흥미롭지만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기호학이다.
경북대학교 박정순 교수(신문방송학)의 <대중매체의 기호학>(나남, 1995)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든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이론서가 아니다. 이 책은 기호학의 기초 개념과 이론을 소개하고, 이들을 대중매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여성 기자는 ‘여기자’로, 남성 기자는 ‘기자’로 표현하는 ‘탈명화’(ex-nomination) 현상이, 지배집단(남성)의 이데올로기가 전파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 책이 소개한 로랑 바르뜨의 신화분석을 통해 알게 된다. 새 정부 들어 자주 쓰이는 말인 ‘코드’(code)는 “일정한 규칙에 지배되는 기호의 체계”로, “서로 공유되는 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용된다는 설명도 발견할 수 있다. 은유와 구분되는 환유라는 개념도 흥미롭다. 환유는 일부분을 통해 전체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가족 수를 말할 때 “입이 여섯이다”고 표현하는 것이 그 예이다. 신체 부위 중 유독 ‘입’을 선택해서, 가족이 부양 대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뉴스에서 사용하는 사진도환유다. 어떤 장면의 사진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전달되는 의미가 다르다.
이 책 한권으로 기호학의 대가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기자들이 ‘생업’의 기본 도구로 사용하는 기호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위해서 아주 유용한 입문이 될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독자와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무책임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기자라면, 꼭 한번은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기사 작성에서 단어 하나, 표현 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아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조금만 인내를 갖고 밑줄을 그어가며 정독하면, ‘기표’ ‘기의’ ‘의미작용’ ‘발화체’ ‘지표’ 등의 생소한 용어와 소쉬르(Saussure), 퍼스(Peirce) 등의 학자를 거명하며 기호학적 지식에 대해 잘난 척할 수 있는 덤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