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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다시보기]"진도 나갑시다"

소설가 방현석씨  2003.06.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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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석 소설가



어제는 한 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였다. 한 학기가 어느새 끝나고 학기말 시험이 눈앞에 다가왔다.

나는 지난 한 학기동안 일 주일에 하루씩 어느 대학에 나가서 ‘소설창작 방법론’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이번 주가 종강이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다. 막상 종강을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은 금방 걱정으로 바뀐다. 내가 맡은 강의가 학생들에게 어떤 보탬이 되었을까.

이광수와 김동인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강의계획서대로 황석영과 오정희를 끝으로 오늘 끝이 난다. 수강한 학생들에게 무슨 보탬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진도에 맞추어 강의를 끝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딴 소리 않고 진도 나간다, 그것이 내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세운 첫 번째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들었던 강의 중에서 가장 끔찍스러웠던 것은 했던 얘기를 수업시간마다 되풀이하는 반복형이었다. 분명히 다른 이름으로 개설된 강좌마저도 똑같은 내용으로, 그것도 제자리를 뱅뱅 맴도는 집요한 반복 수업을 듣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그런 수업을 듣고 있노라면 늘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이 있었다. 진도 좀 나갑시다!

요즘 정치권을 다루는 언론의 보도를 보면서 오래 잊고 지냈던 이 말이 자꾸 떠오른다. 진도 좀 나갑시다. 특히 대선 이후 반년동안 계속된 ‘신당’과 관련된 보도는 신물이 날 지경이다. 소설로 치자면 이토록 스토리 전개가 부진한 소설도 없을 것이며, 등장인물들이 단 한 치도 인식의 진보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소설도 없을 것이다. 강의로 치자면 첫 시간에 한 이야기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한 학기를 고스란히 소모한 셈이다.

신당을 놓고 드잡이를 하고 있는 구주류와 신주류 모두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낡은 정치의 청산을 바라는 국민의 여망은 안중에도 없이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쪽이나, 가만둬도 국민이 청산해줄 ‘과거’와 핏대를 세우며 기력을 낭비하는 쪽이나 좋게 보아주기가 참으로 어렵다.

문제는 이 지겨운 소설을 언론이 날마다 연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인들이 진도를 나가지 않고 지겹게 자기반복을 하고 있는 것이야 각자가 처한 이해관계가 그렇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언론이 6개월 내내 이 지진아들의 뒤꽁무니만을 쫓아다니며 중개나 하고 있는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정체와 혼란은 어떤 분야도 제대로 국민의 수준에 맞게 진도를 못 뽑고 있다는 점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밀어붙이고, 네이스를 강행하는 행정부의 태도에서 우리는 환경과 교육, 미래와 인권에 대한 어떤 철학도 발견할 수 없다. 미국과 일본에서 보여준 노 대통령의 지극히 우려스러운 언행과 그 바탕에 깔려있는 현실인식도 예외가 아니다.

신당은 그래서 필요하다. 신당, 좋다. 그러나 어떤 신당인가. DJ와 전라도를 볼모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과 노무현 대통령과 경상도에 기대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자들 간의 쟁투는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확장시킬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민의 수준과 진도에 맞는 정당이다. 언론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지진아들의 입씨름을 중개하는 것이 아니다. DJ를 팔고 있는 자들에게 지금 그들이 DJ의 평등외교와 햇볕정책을 지켜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추궁해야 한다. 강경개혁파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애초에 국민들 앞에 내세웠던 개혁정책들을 지켜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언론은 국민의 수준에 비해 정치의 진도가 형편없이 떨어지지 않도록 논쟁과 보도의 초점을 맞추고 매서운 비판을 가해야 한다. 언론이 진도를 나가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