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이 사라졌다. 세상살이 힘겨운 국민은 사라진 삶의 감동을 찾아 오늘도 묵묵히 일하고 있다. 청와대는 연일 개혁담론을 펼치고 한국사회 아젠다를 주도적으로 주창하는 몇몇 신문들은 예외없이 권부를 비아냥거리고 있다. 자칭 글깨나 쓴다는 논객들이 청와대를 비판하는 글을 쓰지 않으면 ‘팔불출’로 일컬어진다는 얘기도 이젠 진부할 정도다. 하지만 쏟아지는 그런 글 줄기가 시원하지 않다. 단장취의(斷章取義)를 일삼으며 냉소하는 글들이 이 답답한 세파에서 청량한 물줄기가 되지 못한다.
이 지루한 대치상황을 어찌할 것인가. 어느 신문사 논설실장의 고백처럼 자기나라 대통령을 매일 빠짐없이 비판해대는 것도 편안한 일만은 아니다. 결국 나라의 활력만 소진된다. 이에 자극받아 권력이 만만해진 각계 이해단체들은 마땅히 곧추 세워져야할 공적 권위를 무시하기 일쑤며 나라에 대한 국민적 충성심은 휘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를 통해 5년간 국민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공적 권한을 행사하는 노무현 정부는 지속적인 정치적 작용을 행사할 것이다. 매양 날카로운 각을 세우는 주요 신문들은 아마추어의 설익은 곳만을 찾아서 계속 난자할 것이다. 이 버성기고 서걱거리는 갈등은 어떤 부메랑으로 우리 모두에게 돌아올 것인가.
멀지 않은 20여 년 전 통행금지가 있었고 심야에 온 나라는 강제적인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무소불위의 군부정권에 저항하는 모든 움직임은 사회면 1단 기사로도 편집되지 못했다. 언론 스스로 나선 굴종과 굴신도 있었다. 현재 한국 언론은 유례없는 표현의 자유, 비판의 자유를 향유한다. 보도의 현업에서 몸으로 부딪히는 기자들은 다들 공감한다.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지언정 권력의 가시적인 탄압은 오히려 호재이며 특종인 냥 반가울 지경이다. 이 국면을 이용하듯 굴비를 꿰어 놓은 것 같은 냉소적 비판의 일상화는 언론의 자유 만끽 너머로 언론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할 것이다. 매체 신뢰성은 꽃피지 못하고 자신들의 미디어 공신력은 예전만 같지 못하다. 품격도 거칠다. 서서히 영향력의 카르텔은 무너진다. 역으로 한국사회 유기적인 기능발휘를 조정하는 시스템의 온전한 운행을 점검해야 할 청와대의 권능은 초라해진다. 나라의 권위마저 오그라들게 한다. 매스미디어는 단순명쾌하게 이미지의 덧칠과 반복효과로 세상을 새롭게 의미부여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하루가 멀다 하고 1면 톱으로 올려져서 반복되는 부정적인 덧칠에 맞설 맷집 강한 취재원이 과연 있을까.
우리 모두는 한국 사회를 업그레이드하고자 한다. 외환위기에 따른 국가부도 사태가 재발할 수 있는 취약성은 여전하다. 그나마 해외의 길거리에서 한국인으로서 어깨 펴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한국산 휴대전화 반도체 자동차 덕분이다. 그 말고는 무엇이 있는가. 이 시대 최고의 아젠다는 경제회복과 민생안정이다. 갓 취임한 신생정권의 아마추어리즘만을 공격하는 것이 언론의 모든 사명일 순 없다. 언론은 감시자이면서 비판자 이상이어야 한다. 정권이 미진하여 서투르면 격려하면서 나무랄 순 없는가. 비아냥과 진심어린 비판은 다르다. 노동계 파업예고, 전교조 반발, 조흥은행 매각, 새만금 해법, 스크린쿼터 논란…. 천하의 인재가 와도 풀기 어려운 난제이다. 이때 바로 언론이 공론장을 만들어 논쟁과 모든 가설이 백가쟁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여 절충하는 수밖에 없다. 한국의 비전은 환상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고민과 역지사지에서 나온다. 오직 나라 살리기에 노무현 정권도 고뇌하고 언론도 다양하게 문제제기해야 한다.
내부의 균열이 더 무섭다. 외부의 적이 등장했을 때 맞서 싸울 저력마저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는 한발 앞서서 나라의 앞날을 짚어내야 한다. 아무도 상상 못할 난제의 해법 실마리를 문제제기했을 때 그 존재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