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철(J. Herbert Altschull)이 책을 쓴 동기는 다분히 헤겔적이다. 오늘은 과거의 결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미국 저널리즘을 이해하기 위해 그 뿌리를 돌아보는 작업이 이 책 내용이다.
저자는 책에서 헤겔을 부정적(‘반혁명적’)으로 평가했지만, 사상적 영향에서는 벗어날 수는 없었나보다. 책의 원제는 ‘밀턴에서 맥루한까지-미국 저널리즘 이면의 사상들’이다. 예를 들면 언론인들이 추구하는 것이 ‘사실’이지 ‘철학’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추구’라는 목표의 이면에는 복잡 다양한 사상으로 구성된 철학이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보여주고자 했다. 역자 양승목은 한국판 제목을 아예 ‘현대언론사상사’(나남, 1993)로 붙였다. 그 이유로 든 주장, “철학적으로 미국 언론과 서유럽의 언론은 큰 차이가 없으며 오늘날 그들의 언론 이데올로기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하긴 힘들다. 하지만 한국 언론이 미국 언론과 그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이 미국 언론의 이해뿐만 아니라, 한국 언론 그리고 기자 개인의 신념들을 정리하고 성찰하는데 귀중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인정하듯 이 책이 다루는 범위는 야심적(ambitious)이다. 홉스, 로크, 흄, 볼테르, 루소, 칸트, 맑스, 밀, 듀이 등 사상가는 물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미국 언론인 등 수십명에 이르는 인물들의 생각과 삶이 망라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글의 흐름이 체계적이기보다는 산만하다. 이 책에 “지난 4백년간의 서양 지성사를 꿰뚫는 일반 사상사적 성격”(양승목)을 부여하기도 어렵다. 영미적 시각에 편향되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철학자가 아니라, 언론인의 경력을 가진 언론학자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점이 이 책의 매력을 더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딱딱한 사상만이 아니라, 사회적 배경과 사상가들의 개인사가 감칠맛 나게 묘사되어 있다. 번역된 책이 670여 쪽 넘게 두툼하지만, 비교적 쉽게 읽혀진다. 번역서에서 볼 수 있는 어색한 표현이나 모호한 문장이 이 책에서는 거의 발견하기 힘든 것도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한 후 다시는 번역작업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번역에 쏟은 정성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 책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언론 사상들을읽어가면서 눈여겨볼 관점이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 중 무엇을 더 강조하느냐이다. 모든 주장을 자유로이 활동하도록 내버려두면, 진리도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아레오파지티카’의 저자 밀턴이 나중에는 가톨릭 저작에 재갈을 물리는 일에 열중한 사실을 보아도, 이 둘 사이의 패러독스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른바 ‘언론개혁’을 둘러싼 논쟁의 이론적 핵심도 여기에 있다.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은 사회철학과 윤리학의 영원한 숙제였고 저자마다 다른 시각과 해답을 제시해 왔다. 그 시각에는 시대적 상황이 스며들어 있지만, 역으로 철학과 사상은 다가올 시대에 영향을 미쳤다.
혹시 이번 여름휴가를 조용한 곳에서 ‘책이나 읽으며’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는 기자가 있다면, 그 손에 꼭 들려주고 싶은 책이다. 모두 한꺼번에 다 읽을 필요도 없다. 한 부분이라도 읽은 만큼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