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과 통신의 융합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관련 정책을 총괄적으로 담당할 ‘방송통신위원회’ 설립은 참여정부의 공약사항일 뿐만 아니라 언론계 안팎에서도 한 목소리로 요구하는 시급한 현안이다. 그러나 수년째,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만 무성할 뿐 법·제도 및 조직 개편을 위한 실질적인 행보는 지지부진하다. 총괄기구의 출범이 늦어질수록 기존 법규 안에 포함되지 않는 신규 방송·통신 서비스들이 규제 공백상태에 놓여 국민적 피해가 커질 수 밖에 없는데도 방송위 정통부 문화부 등 해당 부처들은 이기주의적 영역 다툼만 되풀이하고 있다.
방송통신위 설립은 방송·통신 정책의 효율성과 일관성 차원에서 그 필요성이 제기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방송과 통신의 영역 구분이 모호해지고 융합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방송위 문화부 정통부 통신위 정보통신윤리위 등으로 각각 분산돼 있는 정책·규제·지원 기능을 총괄할 새로운 감독기구의 설립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외국에서도 방송과 통신을 포괄하는 감독기구를 정비하고 방송통신법을 제정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영국 하원은 지난해 11월 방송과 통신을 포괄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법을 발표했다. 기존의 방송·통신 규제기구를 통합한 총괄기구(OFCOM)를 설치하는 등 디지털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규정이 포함돼 있다. 미국과 캐나다는 이미 FCC와 CRTC와 같은 일원화된 방송통신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탈리아도 지난 97년 방송통신법을 제정하고 단일 감독기구(ICA)를 설치했다.
현재 언론노조와 언론시민단체가 요구하고 있는 방송통신위의 기본 골격은 방송과 통신에 대한 종합적인 정책수립과 규제기능을 담당하는 독립적 합의제 행정기구다. 전문성과 공익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으로 위상을 설정하고,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추천위원회를 통해 위원들을 구성하는 방안이다.
또 방송과 통신의 정책·규제기능이 방송통신위로 통합되면 문화관광부는 기존의 방송관련 기능이 없어지고 정통부는 부처 자체가 폐지된다. 문화부의 경우 영상진흥, 방송광고 등 방송 관련 기능을 방송통신위로 이관하고, 정보통신부의 경우정보통신 서비스 규제 기능은 방송통신위로, 산업지원 관련 기능은 산업자원부로 각각 이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송통신위 설립이 정부 부처의 축소와 폐지 등 조직 개편과 맞물리면서 해당 부처간 이기주의와 이해 상충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에도 문화부가 기존 문화산업국을 미디어산업국과 문화산업국으로 분리·확대한다고 밝히면서 또다시 방송정책권에 간여하려 한다는 언론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정통부와 문화부는 지난달 방송위가 방송·통신 융합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정비한 방송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통부는 “방송과 통신관련 부처가 참여하는 범정부적 협의체에서 체계적인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며 전면 재고를 요구했고, 문화부도 “방송영상산업 진흥정책은 문화부의 고유 영역이고 독자적으로 정책 수립을 하도록 돼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따라서 대통령 직속으로 한시적인 준비 기구를 설치해 방송통신위 출범 및 통합 방안을 정비하고, 여기서 마련된 관련 법규와 제도를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참여정부의 공약에도 ‘방송통신위 설립’과 이를 위한 ‘방송통신구조개편추진위원회 구성’이 포함돼 있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보고서에도 ‘방송·통신 융합에 따른 법제 정비’가 명시돼 있다.
한나라당 문광위 의원들은 방송통신위 설립과 방송통신법 제정을 위해 국회에 ‘방송통신발전연구위원회’를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한나라당 고흥길 의원측은 “부처간 영역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이를 조율하고 종합해 통합된 방안을 만들 필요가 있다”며 “대통령 직속보다는 국회에 구성하는 것이 객관성을 더 담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당 방침으로 확정되면 방송통신발전연구위 설치에 대한 국회결의안을 제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제 언론계뿐만 아니라 방송위 문화부 정통부 등 관련 부처, 정치권 등 누구도 방송통신위 설립이 필요하다는 원칙과 당위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철학과 방향이다. 방송과 통신 중 무엇에 더 비중을 둘 것인지, 방송과 통신 영역의 산업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 중 어디에 방점을 둘 것인지 등에 따라 관련법 및 통합기구의 위상과 목적, 활동 내용 등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방송의공익적·문화적인 측면이 통신의 산업논리에 의해 약화돼선 안된다는 지적이 높아지고 있다.
김광범 언론노조 정책실장은 “방송·통신 전반을 관장하는 일원화된 독립규제기구 설립은 부당한 권력의 압력과 관료적인 부처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국민의 보편적 서비스를 지켜낼 유일한 대안”이라며 “방송의 공익성보다 상업화와 산업론이 우세해지는 시대적 환경에서 방송통신위원회가 방송의 이념과 공공성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