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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본 미디어 세상] 죽도록 즐기기

김영욱 위원  2003.09.08 22: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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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한국언론재단 선임연구위원



닐 포스트만(Neil Postman)의 출발점은 ‘매체가 메시지다’라고 주장한 맥루한과 같다. 매체와 무관한 세계에 대한 서술이 있고 그것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매체의 기술적 조건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결정한다는 생각이 그렇다. 단지 포스트만은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다. ‘미국 인디언이 사용한 연기신호로 철학을 논할 수 없다. 첫 번째 공리를 말하고 나면 담요가 모자랄 것이다’는 식의 설명이 그렇다. 하지만 텔레비전에 대한 평가에서 두 사람은 정반대다. 맥루한은 새로운 매체를 통해 인쇄매체 때문에 축소되었던 인지의 다양성이 복원된다고 보았다. 포스트만은 텔레비전 주도의 ‘쇼 비즈니스 시대’에서 인쇄매체 시대에 가능했던 이성적인 사회적 담론이 죽어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책 제목이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 정탁영·정준영 역, 참미디어 1997)이다.

이 책은 단순히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의 폐해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매체의 인식론적 속성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수의 움직이는 그림을 내 보내는 텔레비전에서는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논의가 불가능하다. 유일하게 오락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쇄시대와 텔레비전 시대의 미국을 비교해서 보여준다. 예를 들면 이렇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지성인들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을 쓸 당시(1986) 대통령은 배우 출신이었다. 1776년에 발간된 토마스 페인의 ‘상식’이 약 40만부 팔렸다. 현재의 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2400만부에 해당한다. 오늘날은 미식축구 결승전이나 받을 수 있는 주목이다. 미국을 방문한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가 극장에 가면 모든 관객이 기립했고 마차를 타고 가면 사람들이 몰려와 함께 따라다녔다. 오늘날은 마이클 잭슨이나 누릴 수 있는 인기다. 에이버러햄 링컨이 정치 토론에서 한 사람의 발언 혹은 반론시간이 1시간 이상 어떤 때는 3시간씩 진행된 예도 있다. 오늘날 텔레비전의 후보자 토론에서 1분 혹은 1분 30초 등의 단위가 사용되고 있다.

텔레비전 시대에 미국의 정치, 종교, 스포츠, 교육 등은 모두 쇼 비즈니스로 변화되었다. 뉴스도 마찬가지다. 잘 생기고 상냥한 앵커가 읽어주는 뉴스 쇼는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비정보(disinformation)만을 전파할뿐이다. 텔레비전이 사회적·지적 우주의 배후조종자가 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위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텔레비전을 비판하는 지성인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텔레비전에서는 사회적 담론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저자의 견해를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미국 상업 텔레비전과 달리 유럽 공영방송들은 이성적 사회 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낄낄거리며 웃게 만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우리 사회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포스트만의 경고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락 매체로 발전해 가는 인터넷과 이동통신 역시 우리를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안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