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건 9월 7일 낮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였다. 그가 내게 명함을 건넸다. ‘전북도의회 의원 이경해’. 그는 덧붙였다. “그건 전직이고, 지금은 그냥 농민”이라고. 명함 뒤쪽 약력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1990년 스위스 제네바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할복투쟁”. ‘아, 이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그는 세계무역기구 제5차 각료회의(9월 10∼14일, 멕시코 칸쿤)에 한국농민의 목소리를 전하러 간다고 했다.
그는 멕시코 현지에서의 숙식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그는 178명으로 이뤄진 ‘한국민중 칸쿤투쟁단’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에게 물었다. “칸쿤에서 어떻게 지내실 겁니까?” 그는 말했다. “회의장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할 작정이에요.”
그날 그와 나는 밤 12시가 다 되어 칸쿤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일단 ‘한국민중 칸쿤투쟁단’의 숙소인 아쿠아마리나호텔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나와 한방을 쓰게 됐다. 그는 새벽이 다 되도록 방 여기저기에 온갖 자료를 펼쳐놓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자료 한 장을 건넸다. 영문으로 된 2쪽짜리 칼라 유인물이었다. “Say the Truth, and Exclude the Agriculture from WTO!”(이제 진실을 말하라. 그리고 농업을 세계무역기구 협상에서 제외하라!). 그는 예의 순한 웃음을 지으며 “영어를 못해서 주위의 아는 박사님한테 부탁해 만든 것”이라고 덧붙였다.
피곤에 찌든 나는 이내 잠에 빠졌다. 그리고 그의 존재를 한동안 잊고 지냈다.
9월 10일(현지시각) 아침, 그는 칸쿤 시내에서 열린 ‘세계농민행진’에 함께 했다. 시위행렬이 멕시코 경찰이 쳐놓은 철책 바리케이트에 가로막혔다. 그는 철책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서툰 영어로 끝없이 외쳤다. “WTO kills farmers!” 시위가 막바지로 치닫던 낮 12시 50분께 그가 철책 아래로 떨어졌다. 왼쪽 가슴에 칼이 꽂혀 있었다. 그는 칸쿤종합병원으로 급히 실려가 응급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바다 건너 그의 고향에선 추석의 여명이 터오를 무렵 그는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우연찮게 그의 마지막 순간에 적잖은 시간을 함께 보낸 나는, 그의 죽음 뒤 많은 질문을 받았다. 외신 기자 등 많은 이들은 그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거나 말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죽을 생각을 한 것은 아닌데, 잘못 찔러서 죽은게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십수년 전 할복을 “자극적이고 조절불능의 행동”이라 자평했던 그가 시위에 나서며 왜 칼을 주머니에 넣어갔는지,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기 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때문에 따로 할 말도 별로 없다. 다만 “WTO kills farmers!”라는 그의 마지막 외침은, 그의 고단했던 생처럼 외롭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 외침엔, ‘자유로운 세계시장’이라는 미명 아래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고 있는 한국 농민뿐만 아니라, 세계의 소농민들, 지구 위의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희망’이 깊게 배어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