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리를 비롯한 몇 개의 나라에게 이라크 파병을 요청했다. 논란 속에 의무와 공병부대를 이미 파병한 우리나라는 다시 전투병 파병을 놓고 찬반 양론에 휩싸이고 있다. 언론은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견해를 빌어서 찬반으로 갈라져 있는 주장을 기사화하고 있다.
이번에도 두 주장 모두 ‘관계에 대한 고려’와 ‘국익’을 근거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다. 파병찬성론자들은 우리와 미국과의 ‘특별’ 관계에 입각한 국익을, 파병반대론자들은 우리와 국제사회와의 ‘보편적’ 관계에 입각한 국익을 말하고 있다. 파병찬성론자들은 미국에 대한 의리와 충성심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라크복구사업에서 배제되는 것을 비롯한 경제적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우려와 한반도에 대한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내보이고 있다. 반면에 파병반대론자들은 명분없는 미국의 침략전쟁에 동참하는 것은 국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한국의 세계진출 전략에 차질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상실할 수 있다는 강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두 견해를 대부분의 언론은 병렬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정부도 국익에 입각해서 신중하게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국익을 중심에 두고 타당성을 검토하자는 태도는 예전에 비교해서 훨씬 이성적이다. 우리 사회가 맹목과 야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것은 본질에 대한 언론의 깊고 날카로운 접근의 결여다. ‘관계에 대한 고려’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정부의 모호한 입장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언론은 뉴스의 표면과 함께 그 이면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의욕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전쟁은 두 개의 상반된 정치적 의지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당연히 모든 전쟁은 정치적이다. 비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정치행위가 전쟁이다. 무력을 동원해서 상대의 의지를 꺾고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행위가 전쟁이다.
전쟁 중에서도 대등성이 결여된 경우를 침략전쟁이라고 한다.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을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미국과 이라크 모두가 자신의 의지를 상대에게 무력으로 강요하겠다는 대등한 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신의 구상대로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있었고, 이것을 이라크에게 강요하려고 한 것이다. 반면에 이라크는 미국에게 무력을 동원해서 강요할 어떤 의지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침략전쟁은 그 의지가 일방적이듯이 전개과정도 일방적이다. 미국의 이라크침략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당연하다.
그런데 왜 승자인 미국이 지금 전전긍긍하며,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던 유엔의 허울을 빌리려하고 한국을 비롯한 만만한 나라들에게 이라크 참전을 또 다시 강요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침략전쟁의 성격 자체 속에 피할 수 없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침략전쟁은 두 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침략의 단계와 지배의 단계다. 침략은 쉽다. 그것은 공간적인 개념이다. 바그다드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것은 쉽다. 사이공과 다낭, 훼에 성조기를 휘날리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베트남을 지배하는 일이 쉽지 않았듯이 이라크를 지배하는 일 역시 쉽지 않다. 침략은 빼앗는 것으로 목표를 달성하지만 지배는 복종을 통해서 확보된다. 지배에는 정의의 개념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여된 침략자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에서 지배는 곤경에 봉착한다.
미국은 침략에 성공했다. 지배에 성공할 것인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지배를 위해서 미국은 병력을 읍면동 단위로 분산해야 할 테고, 그러면 연대병력은 중대 소대 분대단위로 분산될 것이다. 분산된 약한 고리들은 지배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이라크인들의 상시적인 공격대상이 될 것이다. 미국이 말하는 이라크 치안 유지를 위한 파병요청은 기실 쉬운 침략전쟁에 이어 기다리고 있는 본격적인 지배전쟁의 최일선에, 이라크인들의 상시적인 공격표적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세워놓겠다는 의도임을 언론은 말해야만 한다.
우리 젊은이들을 늪과도 같은 미국의 지배전쟁의 희생양으로 내놓는 것은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하다. 왜 우리가 또 다시 베트남전쟁을 되풀이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