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우리의 주장]'월급쟁이' 기자의 자화상

우리의 주장  2004.02.24 15:11:15

기사프린트

2003년 10월. 요즘‘월급쟁이 기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가. 그들의 주된 관심사항은 무엇일까. SK비자금으로 불거진 대선자금 수사정국의 소용돌이에서 새로운 사실 하나라도 더 낚기 위해 새벽부터 그 다음날 새벽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한국 기자들. 생득적으로 고달프고 힘겨울 수밖에 없는 기자 직(職)을 택한 오늘의 한국 기자들의 관심과 고민은 무엇인가. 또 그들은 수년전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고 있을까...



한 유력 중앙지에서 있었던 일화 한 토막. 편집회의 시간에 부장이 던진 말은 이랬다.

"아시다시피, 광고 시장이 너무 안 좋다. 그렇다고 판매가 특별하게 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회사측이 초긴축 살림을 살고 있다. 따라서 연말 특별상여금을 받기 어려울지 모른다."

순간 회의실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부장을 말을 듣던 A기자는 며칠 전 부인과의 말다툼을 떠올렸다. 애들 교육비 때문이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두 명으로 늘어나자 혼자 버는 기자 월급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매월 가계부 적자(赤字)가 누적되어 연말 상여금이나 받아야 겨우 현상 유지를 할 수 있는 형편인데, 만일 연말 보너스가 안나온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게다가 13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하기 위해 받은 은행대출금에 대한 이자는. 또 다음달의 아버님 환갑잔치는...

"정말입니까? 연말 특별상여금이 없으면 생활이 안 되는데요?"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자 부장이 이번에는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 너무 심각하게는 듣지마. 특별상여금을 안 줄 수도 있다는 거지, 꼭 안준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제 서야 부원들의 표정이 확 펴졌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주고받기도 했다.



일화에 소개된 신문사는 임금 수준으로 볼 때 언론계에서 상위 그룹에 속한다. 이보다 사정이 나쁜 신문사는 부지기수다. 지방으로 내려가면 아예 말이 안나올 정도다. 보너스의 지급 여부에 따라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하는‘월급쟁이 기자’들의 2003년 늦가을의 자화상은 이처럼 씁쓸하다.

경제 한파로 언론계 환경이 IMF 때보다 나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아직 임금협상을 끝내지 않은 곳도 많은데, 어느 회사는 임금을 동결한다더라, 어느 회사는 상여금을 절반만 준다더라 하는 근거 없는 소문들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굴러다녀 기자들의 사기를떨어뜨리고 있다. 한국 기자들이 사명감을 먹고 사는 직업이 아닌 월급쟁이로 전락했다는 얘기를 들어온 지 오래.

화이트칼라 직업 중 기자들처럼 새벽부터 자정까지 온 몸을 던져 일을 하는 직업군은 많지 않다. 2003년의 기자들은 선배세대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 환경은 갈수록 기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진행되는 양상이다. 몸은 몸대로 혹사당하면서도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대우를 받지 못할 경우 언론에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언론은 사회를 선도할 수도, 정치권력을 비판할 수 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젊은 세대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직업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우리도 한 때 꽤 인기있는 직종이었다는 전설만 되뇌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