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초 한국언론재단에서 실시한 인권분야 전문연수에 참가했다. 인천지역 노동분야를 담당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사회부장의 간곡한(?) 부탁에 타의반 자의반 참가한 연수였다.
창피한 고백이지만 이번 연수에서 처음으로 세계인권선언을 접했다. 천부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권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그 역사가 수많은 희생을 담보로 얻어진 산물인 것도 새삼 느끼게 됐다.
무엇보다 탤런트 홍석천씨와의 만남은 언론의 상업주의와 독선이 얼마나 한 인간의 인권을 유린할 수 있는 지 가늠할 수 있는 자리였다.
아직도 언론에 있어서만큼 인간 홍석천은 인간이 아니다. 단순히 자신들의 신문을 잘 팔리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언론에게 있어 동성애자 홍석천은 ‘차이’가 아닌 ‘차별’의 대상인 것이다. 마치 우리사회의 보편적 성의식을 무너뜨리려는 난봉꾼으로만 여길 뿐이다.
언론에 비친 홍석천과 달리 연수에서 만난 홍석천은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인간이었고, 자신의 이상형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하나의 상품으로서, 탤런트란 직업을 갖고 있는 그에게 언론은 ‘맞상대’ 하기엔 너무 버거운 상대인 듯 보였다. 적극 대응할 수 없는 탤런트로서의 현실이 홍석천을 주저앉힌 것이다.
다행인 것은 언론이 홍석천을 유린할 동안 우리사회는 조금씩 ‘차별’을 ‘차이’로 보기 시작했고, 스스로 인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언론도 차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서서히 변방에서 중심으로 옮겨놓고 있다. 늘어난 소송 탓에 기사 한줄 한줄 조심성을 기하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오자. 지난 4년 동안 나에겐 ‘홍석천’이 없었을까. 단정하기 어렵다. 기자라는 권력에 안주한 채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적도 있었을 것이고, 올바르게 세상을 보기보다 내 주장만이 옳다며 취재원을 몰아 부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기사는 화려하게 포장해 놓고, 일상에선 그 반대된 생활을 영위했을 지도 모른다. 맡고 있는 노동분야의 취재과정 또한 마찬가지였을 터다.
이번 연수만으로 ‘인권’을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다. 처음 세계인권선언을 읽고, 인권영화를 몇 편 감상하고, 인권운동가의 강의를 받고, 몇 개의 인권침해 사례를 접했다 할 지라도 그것은 형식적인 지식에 불과할 뿐이다.
실천의 노력을 장담하지않겠다. 단지 현장에서 계속해서 ‘인권’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에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