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란 말은 원래 역사적 개념이다.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전환하는지는 두 사회를 비교해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화가 가시화될 무렵,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시대를 전환기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미리 내다볼 수 있다는 오만의 결과이기보다, 변화에 대한 놀라움과 무력감을 ‘개념화’해서 안심하려는 노력이었다. 이 전략은 아직 유효하다. 우리는 전환기에 살고 있다.
정보통신 업계가 십수년 전부터 금방 실현될 듯 통보한 ‘기술 천국’은 아직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변화는 이미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변화가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가? 우리가 진정 전환기에 살고 있는가? ‘매체 철학’으로 불리는 논의들이 제기되는 것도, 폐기된 것처럼 보였던 맥루한이 다시 부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코뮤니콜로기’(Vilem Flusser, 김성재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의 저자도 이 맥락에서 주목받고 있다. 책 제목은 ‘(인간)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학문’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플루서는 커뮤니케이션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인간에게 엄습하는 잔인한 ‘무의미함’을 잊으려는 기교라고 말한다. 이것은 냉소적인 말이 아니다. 죽음이 엔트로피의 한 형태라면, 커뮤니케이션은 정보를 생산함으로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노력이다. 이런 커뮤니케이션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코드(상징 체계)로 이루어진다. 저자가 주목하는 코드는 ‘그림’ ‘텍스트(알파벳)’ ‘기술그림’의 3가지다. 저자는 문명사를 이 세 코드의 전환으로 설명한다. 동굴벽화 같은 그림은 세계를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은 신화와 마술로 삶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 후 발명된 텍스트는 그림을 ‘개념화’해서 세계를 파악한다. 텍스트는 그 선형(직선)적 특징 때문에 학문과 기술을 가능하게 했다. 그 후 나타난 것이 ‘사진’ ‘영화’ ‘텔레비전’과 같은 기술그림이다. 기술그림은 초기 단계의 ‘그림’과 달리 (세계가 아니라) 텍스트를 상징으로 나타낸다.
텍스트에서 유효했던 학문적 진실이나 역사적 진보는 기술그림 코드에서 의미를 잃는다. 하지만 새 코드의 해독법을 우리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기술그림이 대중매체를 통해 사방으로 전파되는 상황에서, 정보는 생산되지 않고 흩어질 뿐이다. 이것이 플루서의위기 진단이다.
1970년대 중반에 발표된 글이 독일에서 1996년 책으로 발간되고, 그 후 재발간을 거듭하는 것은, 인터넷이 가진 위험과 가능성에 대한 그의 시사 때문이다. 인터넷의 코드도 기술그림이다. 플루서가 제시하는 새로운 사회는, 구성원 모두가 망으로 연결되어 제약 없이 대화를 할 수 있고, 그래서 끊임없이 정보가 생산되는 사회다. 그는 다른 책에서 이를 텔레마틱(Telematik) 사회라고 부른다. 인터넷은 기술적으로는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단지 가능하게 할뿐이다. 플루서가 인터넷을 직면한 우리의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선후(先後)와 인과(因果)를 구분하는 텍스트 코드에 훈련되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를 준다. 우리에게 커뮤니케이션이 무엇인가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