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사 능금장사 고기장사 쌀장사 종이장사 인쇄장사 글장사 돌가루장사 그림장사 그리고 어느 선배의 넋두리처럼 '몸파는 기분으로' 틀어박히는 취직 등.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망을 한번쯤 겪어본 사람들에게 무슨 장사면 어때." 정연주 한겨레 워싱턴특파원이 동아투위 출범 두돌을 맞아 쓴 글에는 투위 인사들의 생활고가 배어 있다.
정부 당국은 갖은 형태로 압력을 가해 동투 인사 대부분이 어렵사리 마련한 일자리마저 놓게 만들었다. 77년 1월 동투 인사 113명의 취업 상황을 보면, 미취업자가 전체의 19%인 20명이고 나머지 93명은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했다. 동투 인사들은 박정희 정권이 붕괴된 79년 10월 26일까지 구속 12명, 구류처분 17명, 중앙정보부 등 수사기관에 연행 조사받은 사람이 80여명에 이를 정도로 해직 이후에도 여러 가지 형태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99년 10월. 이들의 근황은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달라져 있다. 동투에서도 정확한 신상 자료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주로 학계나 정계, 언론출판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고준환(경기대 교수) 권근술(한겨레 논설고문) 권영자(한나라당 의원) 김명걸(한겨레 논설위원) 김민남(동아대 교수) 김병익(문학과 지성사 대표) 김언호(한길사 대표) 김종철(연합뉴스 사장) 김진홍(외국어대 교수) 김태진(다섯수레출판 대표) 김학천(건국대 교수) 박지동(광주경상대 교수) 송진오(교육방송 부원장) 오정환(롯데그룹 연수원장) 이계익(문화일보 부사장) 이기중(전자신문 상무) 이길범(방송위 사무총장) 이부영(한나라당 원내총무) 이종덕(국제신문 사장) 이종대(국민일보 주필) 임채정(국민회의 의원) 장성원(〃) 장윤환(대한매일 논설고문) 정동익(전기안전공사 감사) 정연주(한겨레 워싱턴특파원) 조영호(한겨레 전무) 조학래(방송대 교수) 최학래(한겨레 사장) 등.
새로운 천년을 앞둔 시점에서 성유보 동투 위원장의 안타까움은 무엇보다 113명의 숫자가 105명으로 줄어든 것이다. 조민기, 정흥렬, 이의식, 안종필, 김인한, 홍종민, 홍선주, 강정문, 심재택 등 자유언론을 위해 젊음을 바친 8명은 끝내 동아일보사의 사과를 듣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