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 저널리즘은 재귀적(再歸的) 성격을 띤다. 사회적 병리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는 의미에서 재귀적이라고 말한다. 저널리즘의 재귀성은 진단 용어로만 그치지 않는다. 치유의 방편으로도 재귀성은 강조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진단하고, 추스르면서 치유의 실마리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손을 빌린 수술이라는 절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재귀적 노력이 우선되어야 함은 자명한 이치다.
저널리즘 종사자들에게도 재귀성의 적용은 가능하다. 특히 그들의 직업적 행위, 성과와 관련해 의미있는 적용을 할 수 있다. 기사 내용의 진위여부, 질적 수준에 대한 시시비비가 빈번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단정적인 내용에 대한 불만은 윤리적인 측면에 그치지 않고 점차 법적 시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신이 펼쳐낸 내용, 자신의 기자적 행위, 자신과 사회 간 관계 등에 대한 재귀적 질문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록하던 투키디데스는 진실 보고를 위한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첫째, 자신에 가까이 있으며 자신의 관심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둘째, 자신의 주관, 인상, 감정에 이끌리지 않는다. 셋째, 자신이 쓴 내용은 다시 목격자로부터 듣고 확인한다. 검증을 강조하는 그의 재귀성 원칙은 오늘을 사는 기자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것이다. 하지만 투키디데스의 재귀성 원칙은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나름의 재귀성 원칙에도 불구하고 진실의 발견은 여간 힘들지 않았음을 투키디데스는 실토한다. 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목격자를 대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편파적인 목격담도 흔했다. 불완전한 기억을 명백한 것으로 포장하는 목격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취득한 모든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고 다시 질문하기로 했다. 내가 취득한 것들은 과연 신뢰할 만한 것들인가. 나를 걸고 내놓을만한 것들인가. 두터운 재귀성 원칙을 수립하고 실행했던 셈이다.
투키디데스의 두터운 재귀성은 정보기술 혁명 시대를 사는 기자들에겐 보듬어야 하는 값진 미덕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정보기술 혁명으로 인해 엄청날 정도로 정보는 늘어났다. 그에 비례해 정보의 익명성도 높아졌다. 출처가 뚜렷하지 않은 정보도 포탈 서비스 속에 공식적인 정보인 양 맵시를 차리고활보하고 있다. 지혜로운 선택과 예리한 검증이 한층 더 요청되는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다. 재귀성을 발휘해 과연 제대로 정보를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 믿을 만한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없는 한 저널리즘은 포탈 서비스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정보사회는 매우 역설적인 상황을 배태해냈다. 정보는 많지만 가져다 사용하는 데는 더 많은 주의를 요한다. 원하는 대로 빠른 시간 내에 정보를 제공해주긴 하지만 아무도 보증을 서지 않는다. 편리함과 그 그늘 모두 기자들이 껴안아야할 몫이 되었다. 어려운 숙제를 껴안은 기자들에게 기원전의 투키디데스의 두터운 재귀성은 값진 힌트일 수 있다. 2000년의 시간 간극을 넘어 멋진 벗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