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12일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또 다른 차원의 국론분열이 온 사회를 휘감고 있다. 정당은 정당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당리당략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제각각 행보를 취하고 있다. 한국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프로듀서연합회 등 언론 현업 3단체들도 이제 기계적 중립을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총선을 앞두고 마치 ‘보수 대연합 세력’과 ‘개혁 대연합 세력’간의 명운을 건 한판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한국사회에는 ‘개혁과 변화’라는 도도한 물줄기가 흐른다는 점이다.
야당, 보수언론, 개혁언론, 언론단체 진영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한나라·민주당“야당이 몹쓸 짓 한 것처럼 보도” 항의
KBS·MBC “방문 자체가 방송 압력”
총선이 불과 29일 앞으로 다가왔다. 언론에서는 연일 정당지지율과 탄핵안 처리 등에 관한 여론조사를 경쟁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신문과 방송들의 여론조사 결과는 “탄핵처리는 잘못된 것이요, 열린우리당 지지율 1위”라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는 야당이 대통령을 탄핵한 이후 오히려 ‘여론의 역풍’이 사회전반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때문이었을까. 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당직자들은 14·15일,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와 당직자들은 15일에 KBS, MBC 를 각각 방문해 방송의 편파보도를 거세게 항의했다. 뿐만 아니라 16일에는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를 개최해 탄핵안과 관련한 KBS의 방송보도를 집중 추궁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최 대표와 문광위 소속의원들은 15일 KBS와 MBC를 잇따라 방문, KBS 안동수 부사장과 MBC 김용철 부사장을 각각 만난 뒤 “방송이 한나라당이 몹쓸 짓을 한 정당이고 헌정을 중단시킨 것처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실제 충격 그 이상이다”며 “공정방송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민주당 조 대표와 장성원, 박금자 의원 등 민주당 소속 의원들도 이날 오후 두 번째로 KBS를 항의 방문했다. 이날 조 대표는 안동수 부사장과 면담한 자리에서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조 대표는 탄핵안과 관련된 KBS의 특별 프로그램 편성 등을 지적하며 “주요 신문 사설을 보면 ‘방송이 이성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며 “KBS가 편파성이 있다는 것은 우리만의 일방적인 주장과 요구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KBS 안동수부사장은 “야당대표들이 연이어 방송사를 방문한 것 자체가 언론에 대한 압력인데이것도 모자라 수신료를 들먹이며 공정방송을 요구한 것은 엄연한 방송탄압이다”며 “신문들도 마치 KBS가 잘못 한 것처럼 기사를 썼는데, 그 자체가 공정보도에 위배된 것 아니냐”고 항변했다.
조중동 사설 “방송사 중립성 객관성 상실”
언론계 “방송 때리기 국면전환 노린 것”
동아와 조선이 기사와 사설을 통해 국민여론의 절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방송에 대한 고삐를 죄고 있다. 중앙도 한 발 뒤에서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며 두 신문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보수의 상징인 ‘조·중·동’이 왜 방송의 편파성을 들고 나오는 것일까. 언론계 종사자와 언론학자들은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보수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이들 신문들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즉 보수대변지로서는 사활을 건 싸움이요, 대세를 바꾸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들 언론도 ‘총선에 올인하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들 신문들의 12일 탄핵안 가결 이후 3일간 사설을 종합해보면 방송에 대한 혹독한 비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16일 ‘방송위원회는 TV도 보지 않는가’라는 사설을 통해 “TV와 라디오들이 대통령 탄핵사태와 관련해 국민불안과 집단행동을 부추기는 프로그램을 연일 내보내는 지금 방송상황을 보면, 방송위는 TV도 보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는 모양이다”고 꼬집었다.
또한 전날에는 ‘방송은 이성을 찾아야 한다’는 사설을 통해 “방송이 대립·대치하는 정치세력의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데 매달린다면 모든 세력은 먼저 방송을 차지해야겠다는 노골적인 싸움을 벌이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공영방송의 종말과 같은 것이다”고 주장했다.
중앙도 16일 다소 양비론적인 내용이지만 ‘탄핵방송보도 문제 있다’는 사설에서 “KBS의 탄핵 보도프로그램 편성은 지나치게 과도했다”면서 “방송은 어느 특정 정파의 소유물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동아도 15일자 사설 ‘TV탄핵방송 문제 있다’는 글을 통해 “지난 며칠간 탄핵관련 프로그램을 집중 편성한 KBS는 탄핵을 반대하는 의견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는 지적을 받았다”며 “방송위원회는 사회적 파급효과를 감안해 ‘편파방송’에 즉각 제동을걸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와 관련 KBS 이정봉 보도국장은 “대통령의 탄핵안 뉴스는 하루 종일 방송해도 될 만큼 비중 있는 뉴스인데다 국민적 관심사이기때문에, 이러한 사실보도 자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시각을 ‘KBS는 친여방송이다’고 규정하고 보니까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내용이 안 보이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인제대 김창룡 교수(언론정치학부)도 “조선일보 고정 칼럼니스트가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가는 걸 보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 것 같다”며 “이번 탄핵안사태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과 세력들에 불리한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잘라 말했다.
KBS MBC 한겨레 경향 “방송협박 중단…조선·동아 반성부터”
“이제 방송마저 탄핵하려드는가?” “수구언론이 준동하고 있다.” 다소 과격한 제목의 성명이 방송사 노조에서 나왔다. 그만큼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잇따른 방송사 항의방문에 대해 격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노조만의 목소리가 아니다. 보도국 기자들에서 부장, 국장, 부사장까지 거의 똑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이들은 거대야당의 방송사 항의방문은 “반민주적이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보수언론에 대해 “반성을 할 줄 모른다”며 항의성 비토도 나오고 있다.
KBS 노조는 15일 성명을 통해 “야당이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수신료 분리징수’문제를 꺼내며 방송사에 엉뚱한 불만을 터뜨리는 등 공영방송 말살 음모를 벌이고 있다”며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하루빨리 이성을 회복하고 민심을 저버리지 말 것”을 촉구했다.
이에 앞서 MBC 노조도 14일 성명을 내고 “한나라당은 당장 이번 주부터 언론대책특위를 재가동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며 “2002년 가을 이회창씨 아들의 병역비리의혹 보도에 항의한다며 한나라당이 방송사에 보냈던 이른바 협조공문이 불러왔던 거센 저항을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벌써 잊었는가”라고 규탄했다.
이러한 성명과 함께 지난 13일부터 방송편파성을 지적하고 있는 조선과 동아일보에 대한 비난도 함께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기자협회 손관수 KBS지회장은 “예전에 동아와 조선 기사나 사설만 보면 사회가 불안해 보였는데 반성은커녕 억지주장을 하고 있다”며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국정혼란을 부추기는 것이냐”고반문했다.
‘MBC기자회’ 황석호 회장도 “우리 방송이 지난 3일 동안 보도한 내용들은 시대정의를 가지고 보도했으며 방송보도의 책무 속에서 다뤄진 것이라 생각한다”며 “조선과 동아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있는지 먼저 가슴에 손부터 대야 할 것”이라고 성토했다.
한겨레도 16일자 사설을 통해 “조선 중앙 동아가 일제히 사설이나 주요기사를 통해 방송사의 편파보도를 들고 나선 것은 언론사가 지닌 편집·편성권의 자율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며 “이들 신문들은 편파보도를 따지기 전에 자신들의 보도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도 13일 ‘야권의 무책임한 언론 책임론’이란 사설에서 “야 3당은 탄핵정국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성해야 한다”며 “언론 책임을 들먹이며 남의 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고 말했다.
언론단체“기계적 중립 결별…공동대책위 구성”
언론단체들이 똘똘 뭉쳤다. 방송과 신문 영역을 떠나 언론자유 수호라는 대의 앞에 손을 맞잡은 것이다. 때문에 이들이 주장하는 목소리도 크게 들리고 있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국제적인 조롱거리로 만들고 대의정치를 희롱하고도 반성하지 않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성토했다.
한국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프로듀서연합회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언론단체들은 16일 성명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기계적 형평론의 허구에 속지 않는다”며 “한국의 언론은 더 이상 정의와 불의, 참과 거짓 사이의 회색지대에 존재하기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들은 “반역사적 탄핵주도세력은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하고, 국민으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은 16대 국회는 자진해산 하라”고 요구했다.
이들 단체들은 또한 “앞으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향후 벌어지는 언론자유 탄압과 방송장악기도에 적극 대처 하겠다”며 “총선보도 또한 정책이나 뒤쫓기 보도를 지양하고 유권자의 의제에 충실함으로써 국민의 알권리 충족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는 이와는 별도로 15일 성명을 통해 “야당이 편파방송 운운하며 방송사를 항의 방문하는 작태는 탄핵정국에서 확산되는 국민적 반발여론을 축소 보도케 하고 ‘방송사 길들이기’에 다름 아니다”며 “야당은 방송장악 음모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앞서 한국기자협회도 14일 논평을 통해 “야당이공정방송과 객관적이고 진실된 보도를 사명으로 하는 방송사를 잇따라 방문해 이들 방송이 헌정중단사태에 처한 듯 보도했다고 지적한 것은 당리당략적 발상에서 나온 언론 흔들기”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