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국회의원선거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지만 선거보도가 탄핵정국에 파묻혀 실종된 느낌이다. 언론보도만 본다면 선거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겠다. 2년 전에 월드컵에 휩싸여 지방선거보도가 증발했듯이 이번에도 비슷한 모습이다. 정치기사는 온통 탄핵정국과 당권투쟁만으로 가득 차있다. 선거기사라곤 중앙당의 당직자 회의 장면이 아니면 당대표의 민생탐방 따위가 전부이다시피 하다. 많은 국민들은 이번 선거를 통해 금년을 정치개혁의 원년으로 삼기를 열망하고 있다. 하지만 변화를 모르는 선거보도를 보면 그 같은 여망이 실현될 지 의문이다.
탄핵정국은 의외의 사태를 가져왔다. 탄핵을 발의하기 이전에는 국민의 1/2이 반대했는데 막상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자 2/3가 반대로 돌아섰다. 탄핵을 규탄하는 소리가 높아지면서 탄핵정국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와 주도세력인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직격탄을 날렸다. 탄핵을 무리하게 추진했던 두 당의 지지도가 곤두박질치자 비당권파니 소장파니 하는 사람들이 지도부에 반격을 가하고 나섰다. 한나라당 대표는 쫓겨나고 민주당 대표도 흔들리는 모습이다.
탄핵을 발의할 때는 같은 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후닥닥 얼굴을 바꿔 딴소리를 낸다. 민주당의 경우 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개혁공천이니 공천반납이니 하는 따위가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따져봐야 한다. 언론이 기회주의적인 소리를 비판도 여과도 없이 보도하니 그들이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표를 계산하는 그들의 말을 중계하듯이 연일 보도하는 자세가 당권싸움을 부추기지는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언론, 후보공천 지연 무관심 일관
선거를 보름 남짓 남긴 시점에서 민주노동당만 빼고 나머지 정당들은 후보공천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국민의 태반은 누가 어디에 나오는지 모를 것 같다. l인2표제가 실시된다지만 주요 정당들이 비례후보마저 확정하지 않았다. 정당만 보고 사람은 보지 말라는 자세인지 무책임한 행태이다. 공천이 지연되면 언론이 늦다고 비판해야 하나 그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늦었지만 언론은 후보검증을 시작해야 한다. 혹자는 1천명이 넘는 후보자를 어떻게 검증하느냐고 반문한다. 힘든 작업임에는 틀림없지만 공중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무엇보다 언론이 정치개혁을 추동하기 위해서는필수적이다.
불법대선자금은 정치지형에 큰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수구세력이 퇴조하고 신진세력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대목이 있다. 신진인사라면 무조건 참신하고 청렴하느냐 하는 문제다. 그들 중의 상당수는 능력-자질-자격이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 정치건달들이 신참이라는 탈을 쓰고 의사당에 진출하면 정치가 더 나아질 것도 없다. 이 점에서 미검증 인사에 대한 검증이 중요하다. 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자등록을 끝내면 그들의 학력, 경력, 전과, 재산, 병력, 납세 등을 발표한다. 2년 전 지방선거 때처럼 입후보자의 평균재산이 얼마이고 누가 재산이 가장 많고 하는 따위의 분석기사는 필요 없다. 이 자료를 근거로 신고내용의 정확성-정직성-진실성을 따지는 노력이 중요하다.
‘차떼기’가 남긴 산물이 있다면 수구세력에 대한 퇴출압력이다. 수구세력의 퇴장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나이 든 이는 모두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사회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정리해고제, 인터넷, ‘노무현’출현으로 사회구조의 노령화와 달리 고용구조는 급속하게 연소화하고 있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다선의원에 대한 무차별적인 퇴출압력에 언론이 가세하여 입후보자의 평균연령이 크게 낮아졌다. 이번 선거가 수직적 인적교체를 유발하여 세대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아졌다. 언론은 지금 젊음은 아름답고 늙음은 더럽다는 무의식에 빠져 있지 않는지 되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당대표 이벤트성 행보 ‘줄줄이’보도
국회의원 선거인데 언론보도에는 입후보자들은 없고 당대표와 대변인의 시류에 영합하는 말과 몸짓만 가득 차 있다. 언론은 그들의 뒤를 쫄쫄 쫓아다니며 하찮은 말과 시시콜콜한 행동을 일일이 담아낸다. 하지만 거기에는 앞으로 4년 동안 나라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실천적 구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열린우리당 대표는 잠바를 입고 시장바닥을 누비고 한나라당 대표는 택시로 출근한다. 그들은 그것을 민생탐방이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백성의 고통을 정말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한나라당 대표는 첫날 사찰을 찾아 108배하고 이어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한 다음 교회에 들러 참회예배를 드렸다. 신앙심과 상관없는 종교순례를 무비판적으로 크게 다루어도 좋은지 자문하기 바란다.
열린우리당의상가당사나 한나라당의 천막당사도 그 의미가 얼마나 진지한지 모르겠다. 이것을 언론은 ‘이미지 정치’니 ‘이벤트 정치’니 하고 말한다. 언론이 이런 감각적인 행동을 아무런 의식도 비판도 없이 보도하니 정치권이 인기상승효과를 노려 그 짓에 매달린다. 언론이 그 따위를 정치의 본령처럼 보도하니 정책대결을 할 필요가 없다. 언론이 정책을 검증하지 않으니 정당이 정책을 개발하지 않는다.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의 정책차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또 그들은 다같이 개혁을 말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언론은 그것을 묻지도 않는다. 유권자는 무엇을 보고 찍으란 말인가? 그런가 하면 정책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민주노동당은 지지율에 비해 홀대한다.
흔히 경마식 보도를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도 다를 바 없다. 언론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어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수직상승이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급강하이다. 여론의 급속한 이동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충격적인 변화이다. 그러니 여론조사가 더 빈번해지는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꼬리를 무는 여론조사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 즉 될 사람 밀어주자는 악대차 효과(bandwagon effect)와 함께 안 될 사람 밀지 말자는 패배견 효과(underdog effect)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정당간에 뚜렷한 정책차이가 없다면 인물도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정부정책 정당성 점검노력도 부족
최근 들어 정부가 일련의 경제정책을 발표했다. 신용불량자 지원대책, 서비스업 지원대책, 특별소비세 한시인하, 창업투자 지원방안, 공공부문 비정규직 10만명 정규직 추진 따위가 그것들이다. 왜 이런 선심성 정책을 선거를 앞둔 시점에 무더기로 발표하는지 의문이다. 정책의 타당성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선심성이 짙다는 점에서 정당성-유효성을 면밀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눈에 잘 띄이지 않았다. 정부가 선거의 중립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언론은 이런 문제도 심도 있게 따져 보아야 한다.
2년 전에 지방선거가 월드컵에 파묻히자 선거보도도 증발했다. 언론이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감시활동을 폈더라면 지금 철창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들을 지방의회 의원이나 단체장으로 선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론이 정치개혁을견인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거보도에 관해 깊이 고민하는 자세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