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이 멍투성이에다 배를 움켜잡고 꾸부리고 있는 모습. 제48회 ‘신문의 날’을 맞은 한국 신문을 이렇게 상상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정확하지도 전문적이지도 못하며, 편파성을 넘어 의도적 왜곡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질타에 든 멍이다. 군사 정권과 일제에 협력한 전력이 거론되며 공정거래법을 어기는 상습적 탈법자로 지적되기도 한다. 경영도 엉망이다. 소수를 제외하면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우수 인력이 모여 일하는 곳이지만,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곳이 한국 신문이다. 배가 고픈 정도를 넘어, 이미 복통으로 바뀌었다.
억울하게 맞는 매라면 차라리 좋으련만, 신문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대부분 정당해 보인다. 이젠 기자를 비롯한 신문인들도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다. 경영 파탄도 환경변화보다는 신문업계가 자초한 부분이 크다. 신문의 내용과 질, 합리성보다는 외양에 치중한 경영을 해왔지만, 시장이 확대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충족되지 않고 있고, 그럴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신문에 대한 비판을 듣고 있으면, 한국에서 신문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뿐더러, 사라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럴까? 단연코 아니다. 개화기 이후 한국 사회가 그나마 여기까지 온 데에는 신문의 역할이 크며, 그 이면에는 적지 않은 신문인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열악한 조건, 잘못된 관행, 뒤틀린 구조로 신문이 제 기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 필요한 정보의 가장 충실하고 기본적인 정보원은 신문이다. 다양한 사회적 담론을 일정한 범위에서 정리하고, 특정한 의제에 주목하게 만들며, 이를 다시 확산하는 것도 신문이다. 아직 저널리즘의 중추적 역할은 신문이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신문인들의 노력과 사명감, 그리고 희생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방송의 역할과 영향력이 커지고 있고 인터넷이 대안 및 보완 미디어로 부상하고 있다. 모두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이들이 신문이 담당해온 보편(universal) 저널리즘을 대체하지는 못하고 있다. 신문은 종합적 미디어다. 사건을 머릿기사와 단신 등으로 경중을 가려 배치하고, 사건의 인과관계와 배경·전망을 해설하고, 사설과 칼럼으로 다양한 의견을 한 지면에서 동시에 제공한다. 매일아침 집으로 배달된 신문을 독자는 펼쳐 들기만 하면 된다. 신문은 선형 미디어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순서로, 원하는 집중도로 독자가 골라서 읽을 수 있다. 기술적으로 신문은 ‘올드 미디어’가 아니다. 전신이 발명되었을 때 혹은 개인컴퓨터가 보급되었을 때 어느 영역보다 먼저 신문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신문사는 첨단 기술의 집합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전기만 해도 첨단 기계공학이 집적된 정밀기계다. 새 기술에도 신문은 열려있다. 신기술과 저널리즘의 접합에서 신문만큼 유리한 미디어도 없다. 저널리즘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신문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신문인의 노력과 헌신을 깔아뭉개고 자존심을 해치는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입장이 다른 신문사와 신문인을 적이나 악으로 보고 배척하기보다는, 동반자로 보고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과점 구조를 개선해야 하지만 신문산업 전체가 타격을 입는 방식은 피해야 하다. 좁아진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경쟁이 소수만이 생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서는 안된다. 살아남은 신문사에게도 결코 행복한 상황이 아닐 것이다. 이미 한국 신문은 자력으로 회생하기 힘든지도 모른다. 신문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하고, 신문을 살리는 정책과 운동을 범 사회적으로 벌여야 한다.
‘신문의 날’을 맞아, 독자의 한 사람으로 신문인들께 감사를 드린다. 그들의 어깨를 감싸안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당신들이 필요합니다. 힘내요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