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국회의원 선거 열기가 점차 높아지면서 언론의 움직임도 더욱 분주해졌다. 투표의사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듯이,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야말로 거대한 정치변혁기에 우리의 정치지형을 크게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선거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기존의 보도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권자들의 정치의식과 요구를 반영하는 ‘유권자 중심의 보도’에 여전히 호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기자협회 평가단의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달 31일부터 이틀간 후보자 등록을 마치고 유권자들로부터 심판을 받을 후보자들의 신상을 공개했다. 학력과 경력, 전과, 재산, 납세, 병역 등을 통해 후보자들의 가치관과 역사의식, 도덕성과 청렴성 등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였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이를 지나치게 도식화, 계량화했을 뿐, 후보자를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평가단은 지적했다. 언론은 재산 순위, 납세 순위, 전과 순위 등을 나열하는데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면서 후보자들을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웠다.
전과자는 양심범과 파렴치범을 구분해야 하는데도 이를 여과 없이 보도했다. 더욱이 사기, 사문서 위조 등 파렴치범은 무소속과 군소정당 후보들에게 집중됐는데도 마치 많은 후보들이 파렴치범인 양 일반화시켰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오랫동안 투옥된 이들은 적법하게 군대를 면제받은 경우인데도 이에 대한 설명없이 ‘군 면제’ 후보를 정당별로 집계해 마치 파렴치한 방법으로 군대를 면제받은 것으로 일반화시켰다. 예를 들어, 어느 민주노동당 후보의 경우 민주화운동으로 ‘별’을 달았고, 군도 면제받았는데 언론은 이런 후보들의 사정을 무시한 채 ‘2관왕’이니 ‘3관왕’이니 하는 표현으로 몰아 부쳤다.
언론의 이런 보도행태는 결국 정치권 전반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이어져 투표율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초래할 것으로 평가단은 지적했다.
또 후보자가 공개한 내역에대해 구체적인 검증작업도 미흡했다는 지적이다. 언론은 최소한 주요 정당의 지도급 인사나 대표적인 후보자들에 대해서는 재산을 성실히 신고했는지, 재산세는 제대로 냈는지, 파렴치한 전과기록은 없는지 등을 검증하지 않았다. 예컨대, 서울 강남의 수백평 집을 가지고 있는 후보의 재산이 터무니없이 낮게 신고된 경우도 있었으나, 언론은 무관심했다.
이번 선거는 보수정당 일색이었던 50여년 헌정사상 처음으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 확실시되고 있다. 정당별로 정책의 차별성을 보여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인 셈이다.
선거전이 본격화하면서 언론은 각 당의 정책과 공약을 소개하고, 나름대로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사를 지면과 화면에 할애하는데 너무나 인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당별 또는 분야별로 많아야 4∼5차례 소개하는 게 고작이다. 심지어 어느 신문은 정당별·분야별 정책을 한 기사에 통째로 다루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각 당의 공약이 과연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재원조달 방법과 정책의 실효성은 있는지 등을 찬찬히 짚어주는 기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고교평준화제도에는 어느 당이 찬성하고 어느 당이 반대하는지, 각 당은 국가보안법 철폐문제에 어떤 입장인지 지면과 화면에서 찾기란 ‘숨은 그림 찾기’ 만큼이나 어렵다. 이런 보도 행태를 보이고 있는 언론이 정치권을 향해 ‘정책선거가 실종됐다’고 비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책검증이 사라진 자리에 후보자 검증이라도 자리하고 있다면 좋으련만, 우리 언론은 후보자를 소개하고 비판하고 검증하는데도 인색하다.
신문과 방송은 후보자를 선거구별로 하루 1∼3꼭지씩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유권자들이 중앙 언론을 통해 후보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데도 선거일까지 소개되는 곳은 전체 243개 선거구 가운데 많아야 50곳 안팎에 불과하다. 그나마 소개되는 지역도 유권자들이 갈증을 느낄 정도로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가 미흡하다. 신문은 지면이 없다면 지방판을, 방송은 로컬시간을 활용해 해당지역의 후보자를 소개하면 좋으련만, 이런 시도는 일부에 그치고 있다.
이번 선거부터 합동연설회와 정당연설회가 사라지고 ‘미디어 선거’를 유도하고 있지만 언론은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수구세력의 퇴조와 함께 자연스럽게 정치 신인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유권자들은 이들을 잘모른다.
더욱이 언론은 여론조사 등을 통해 기존 정치인보다 정치 신인의 ‘인물 적합도’가 낮게 나타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언론에 자주 노출된 방송인들만이 예외다. 언론 보도대로라면 정치 신인들은 능력이나 자질 등 인물 평가에서 모조리 현역 의원보다 못하다. ‘인지도’가 맞는 표현인데도 ‘인물 적합도’로 잘못 보도해 빚어진 일이다.
지역구 뿐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들에 대한 검증도 없다. 지난주 정당별로 비례대표 후보가 발표됐지만 언론은 상위 후보 한 두 사람만을 화제거리 정도로 소개하는 데 그쳤다.
정책과 후보자 검증이 사라진 자리에는 당 대표나 선거대책위원장을 동행 취재하며 워딩이나 동정, 이벤트 중심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전달하는 이른바 ‘쫄쫄이’ 보도로 채워졌다. 이런 현상은 지난 2일 선거운동이 시작돼 후보자들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이후에도 여전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환경미화원들과 컵라면을 먹고,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재래시장을 방문해 시장상인과 악수하는 모습만 부각했다. 이들이 환경미화원이나 재래상인들에게 어떤 정책을 제시했는지는 뒷전이다. 추미애 민주당 선대위원장이 광주에서 3보1배 이벤트를 펼쳐도 언론은 현상만을 전달했다.
이런 ‘쫄쫄이 보도’는 정당 출입기자들의 취재 시스템에서 기인한다. 그러다 보니, 민주당보다도 지지율이 높은 민주노동당의 기사가 턱없이 적게 나오는 모순을 낳고 있다. 민주당은 2∼3명의 출입기자가 있어 어떻게든 기사를 만들기 위해 세세한 부분까지 눈길을 주지만, 민노당은 출입기자가 다른 당과 겹치기 출입을 하다 보니, 기사를 꼭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이밖에 각 당이 대변인을 비롯해 여성 정치인들을 ‘얼굴마담’ 삼아 이미지 정치를 꾀하는 모습도 언론이 무비판적으로 소개하는데만 그치고 있다.
그래도 지방 유권자들은 신문의 지방판이나 방송 로컬시간에 그 지역의 후보자와 선거구별 이슈를 일부 접할 수 있지만, 전체 선거구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서울과 수도권 유권자들은 언론의 집중적인 중앙당 중심 보도로 정보가 제한돼 있다.
더욱이 지난 2000년 4·13 총선 때에 견줘, 이번 선거에서는 신문 사회면에서의 총선 보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나마 4년 전에는 신문의 사회면을 통해 이색 선거운동이나, 특이한 공약, 선거구 쟁점 등을 통해 후보자를검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당시엔 사회면 1개면을 총선용으로 할애한 신문도 적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양과 질에서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평가단은 결론적으로 신문과 방송이 알맹이 없는 ‘쫄쫄이 보도’를 지양하고, 폭넓은 정책 검증, 후보자 검증을 위해 총선보도 지면과 시간을 늘리는 ‘신문의 지면허물기’, ‘방송의 시간허물기’를 과감히 시도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