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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다시보기] 앵커의 눈물

언론 다시보기  2004.04.21 1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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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진 서강대 신방과 교수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로 손꼽히는 월트 크롱카이트. 다른 영역의 인물들을 제치고 언론인이 그 영예를 차지했다는 점을 두고 미국 언론도 늘 자랑으로 여긴다. 그런 그도 언론인으로서의 자질과 관련한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1963년 11월 22일의 사건 탓이다.

그날 케네디 대통령이 댈라스에서 총격을 당한다. 정직, 성실, 믿음, 프로정신을 앵커의 몫으로 삼는 크롱카이트가 그 급박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마이크 앞에 앉았다. 아직 자세한 내용을 받지 못했던 그는 계속해서 대통령이 총격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사망했음을 알렸다. 대통령의 사망소식을 알릴 즈음해서 크롱카이트는 크게 울먹였다.

미국의 30분짜리 저녁 뉴스는 광고 시간을 빼고 나면 23분 정도에 불과하다. 대체로 그 23분을 앵커가 진행하고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앵커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앵커 시간이라는 용어보다는 월터 타임이라는 용어가 더 일반적이다. 이처럼 모든 앵커의 대명사처럼 불리우는 크롱카이트가 터뜨린 울음, 눈물은 논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대통령의 죽음은 팩트다. 팩트를 전하면서 앵커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은 살인, 암살에 대한 연민의 정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개인적 감정 탓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크롱카이트는 케네디와의 대담을 통해 인간적 매력, 신뢰를 가지게 되었음을 밝힌 바 있어 그의 눈물은 앵커의 공정성, 객관성에 대한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앵커의 눈물로 인한 논란 이후로 미국 사회는 앵커의 권한에 더 무게를 실어주는 쪽으로 선회했다. 시청자들이 앵커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대한 평가를 자연스럽게 내려줄 것이므로 기계로 잰 듯한 공정성, 객관성을 따지는 일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 셈이다. 앵커들은 눈에 띨 정도로 공정성과 객관성을 어겨가면서까지 인기를 끌려는 무리함을 범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한 몫 했으리라 짐작된다.

한국의 앵커들은 최근까지 그 같은 논란으로부터 자유스러웠다. 제 색깔을 가지려 하지 않은 조심스러움이 앵커의 발목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는 스타일, 용모 등에서는 차이를 내되 세상을 해석하는 색깔까지 두드러지지 않도록 스스로 단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앵커들이 색깔을 가져보려는 욕망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사회적 저항도 간간히 일어나고 있음을 목도한다.

물론 몇몇앵커 개인의 욕망으로만 폄훼할 일은 아니다. 자신이 포함된 방송사의 성향에 힘입어 자기 색깔을 내려는 움직임으로 읽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인쇄 매체와는 달리 매체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방송의 숙명을 크게 위반하지 않으면서 색깔 내기를 원하는 욕망들은 방송 행위 자체가 어차피 정치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 용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의 변화를 꾸준히 관찰하고 그에 맞추어 스스로도 변화하려는 용기와 욕망에 대해서 큰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거쳐야 할 과정이 있음을 잊지는 말자. 한번쯤은 진지한 사회적 토론을 해 볼 것을 제안한다. 앵커 형식을 취하는 프로그램들이 많아져 저널리스트들이 사회적 발언을 할 기회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울음과 눈물의 적정선도 사회적 토론을 통해 얻어내야 할 만큼 방송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