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와 공약에 대한 검증은 없고, 당 대표들의 이벤트와 이미지만 있었다. 17대 총선 보도에 대한 비판이다. 정책은 없고 감성만 있었다. 정치권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다. 이것이 언론의 정치현실 반영의 결과인가 아니면 정치의 언론 보도 태도에 대한 반응인가는 질문은 닭과 달걀의 논쟁이다. 분명한 것은 감성정치가 힘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에서 감성적 측면을 배제할 수도 배척할 필요도 없다. 위기 상황에서 논리적 설명보다는 감성이 국민의 힘을 결집하는데 더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감성이 ‘지배’하는 정치는 합리적 결정과 장기적 목표 추구를 어렵게 만든다. 이번 선거가 어느 때보다 깨끗하게 치러졌고, 의석분포 또한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평가되지만, 선거 결과에서 개별 정책에 대한 유권자의 의지가 무엇인가를 읽기는 힘들다. 정책에 대한 선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닭과 달걀의 논쟁으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언론에 그 책임이 있다고 본다. 정치 행위는 ‘여론’이라는 법정에서 심판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여론의 질’에 의해 좌우된다. 여론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다양성이다. 다양한 주장들이 자유롭게 경쟁할 때 보다 좋은 질의 여론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다양성은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다. 다양성이 확보되어도, 대중매체를 통한 사회적 논의는 표피적인 이미지, 감성, 왜곡, 기만이 경쟁하는 시장이 될 위험을 안고 있다. 다행히 대중매체의 등장과 함께 이러한 위험을 막는 기제가 등장했다. 저널리즘이 그것이다. 저널리즘은 독자에게 중요한 정보를 선택해서 전달한다. 어떤 주장을 단순히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의 진정성, 동기, 실현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함께 제공한다. 저널리즘은 이를 통해 사회적 논의와 여론의 질을 유지한다. 그래서 정치에서 감성과 이미지만이 아니라, 진지한 논의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저널리즘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지성’의 정치는 어렵게 된다. 그러한 정치를 추구하는 정치인도 설자리를 잃게 된다. 일찍 도태되거나 아예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다. 예를 들면 능력과 전문성보다는 방송을 통한 지명도가 정치에서 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우리 언론의 현실이 아닐까?
그래서 17대 국회가 개원하기도 전에 ‘언론개혁’을 중요한 의제로 제기한 것은 무척반가운 일이다. 이를 위해 국회에 ‘언론개혁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계획도 환영한다. 그러나 ‘개혁의 목표’로 제시되는 소유지분제한, 독자 점유율 제한, 법을 통한 기자의 편집권 확보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70%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조선, 중앙, 동아의 독자 점유율이 민주주의 사회가 견디기 힘든 정도의 과점이라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사주에 대한 충성심과 회사 이기주의가 전문직으로서의 기자 의식을 압도하는 현실이 저널리즘에 치명적이라는 것을 부인해서도 아니다. 다만,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지금부터 차분하고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리 설정한 ‘개혁 목표’는 그러한 논의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소모적인 논쟁으로 만들뿐이다.
그 논의에는 신문에 기대되는 다양한 파라미터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신문산업이 망해가고 있다. 멀티미디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다. 지역 언론은 거의 실종된지 오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널리즘의 근간인 신문저널리즘이 위기를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