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의 특징은 과장과 냄비다. 여기에 외신 컴플렉스가 추가된 게 제57회 칸 국제영화제 보도의 실상이다. 마치 ‘마의 기록’에 도전하는 마라톤 경기를 중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거의 전 일간지들이 특파원을 보낸 칸 영화제의 보도 유형은 크게 두 가지다. 외국 매체가 우리의 경쟁 부문 진출작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와 우리 영화가 무슨 상을 받을지다.
초반 화제의 중심이 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별점에서 공개작품 중 최하위를 기록하자 모든 매체가 이 사실을 똑같이 다루고는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올드보이’로 몰려 가버렸다. 이 기사를 접한 네티즌들은 “‘올드보이’는 멀리 나가서 국위선양하고 있는데 왜 ‘여자는∼’은 저 따위 평가밖에 못 받을까”하고 불평한다. 심지어 개망신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한국언론은 매일 ‘스크린 인터내셔널’과 ‘르 필름 프랑세즈’가 매기는 별점에 따라 울고 웃었다. 그리고 ‘올드보이’의 심사위원 대상 수상 의미를 짚어보면서 마무리한다. 기사 말미에는 한국영화계의 마지막 숙원은 3대 메이저 영화제 최고상 수상과 미국 아카데미 수상뿐이라는 사실을 넣는다. 거의 모든 언론이 이 같은 수순을 밟았다. 이쯤 되면 외신 컴플렉스에 빠진 한국기자들이 한국영화가 멀리 스포츠 어웨이 경기하는 것을 취재하러 간 것 같다.
그 외에 눈에 띄는 기사라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화씨911’과 한국영화가 칸 필름마켓에서도 인기가 높았다는 정도다. 2개의 경쟁부문 진출작 외에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청풍명월’과 감독주간의 단편 ‘웃음을 참으면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의 ‘날개’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가 없다. 이들은 스포츠의 번외경기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완성도가 높다고 알려진 자우이 감독의 ‘이미지처럼’과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몰라’에 대한 분석기사도 역시 없다.
영화제의 이런 지상 중계법은 처음이 아니다. 2001년 베를린영화제때 ‘JSA 공동경비구역’이 시사회에 대거 몰려온 외신 기자들의 말을 인용해 마치 황금곰상을 수상할 것처럼 보도했다. 분단 상황에 대한 호기심 차원에서 보인 외신의 관심을 한국 기자들이 작품의 우수성 인정으로 착각해 수상을 기정 사실화하는 기사를 써댔다.
칸 영화제는 경쟁의 장이기에앞서 영화인의 축제다. 그 축제를 통해 나타난 다양한 영화미학을 소개하는 게 매체의 역할이다. 칸에 취재 가기 전 영화팬을 대상으로 칸 영화제에 대해 알고싶은 것들을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챙겨 가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하기야 전 세계 대학생의 스포츠 축제인 유니버시아드에도 금메달 타령을 했던 한국 언론에게 이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토속적 정서를 담은 예술영화에 대한 서양인의 ‘특수한’ 관심을 넘어 ‘웰 메이드’ 상업영화도 인정받았다. 이제 칸을 바라보는 언론의 성적 지상주의적 시선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