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언론다시보기] 위생사회와 감시 그리고 언론

원용진 서강대교수  2004.06.16 10:58:17

기사프린트

원용진 서강대 신방과 교수



권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생사회를 추구해 왔다. 권력은 구부러진 골목길을 참지 않았다. 무질서하게 옹기종기 모여 앉은 판잣집도 인내하지 않았다. 헝클어진 도시는 ‘바르게’를 외치는 권력 앞에서 허물어졌다. 권력의 위생사회 건설 욕망은 위생적 공간 형성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공간을 채우는 컨텐츠에도 욕망의 손길을 미쳤다. 권력의 욕망에 맞춘 권력적 자연을 조경해냈다. 인공 연못도 팠으며, 거대한 분수대도 세웠다. 뿐만이 아니다. 위생 공간을 오가는 이들의 자격을 위생을 기준으로 선별해냈다. 질병, 더러움, 불쾌함과 인접한 이들은 위생 공간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했다. 거지, 소매치기, 창녀, 홈리스, 백수 등은 위생사회를 위한 소탕 대상이 되어 왔다.

위생사회를 향한 권력 욕망은 끝 간 데를 몰랐다. 위생 공간을 오가는 이들의 겉모양 기준을 정해주는 노력도 기울였다. 용모 단정할 것. 늘씬할 것. 어느 틈엔가 그 기준은 모든 이들이 도달해야 할 이상향이 되고 있었다. 권력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이다. 하지만 권력은 더 나아가길 원했다. 권력은 위생 공간을 오가는 이들의 뱃속도 위생적이길 원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스스로 권력이 원하는 대로 늘 뱃속을 고민하고, 들여다본다. 그리고 뱃속이 위생적이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절차들을 꼬박꼬박 지키고 있다.

권력이 꿈꾸는 위생사회는 보기에 좋은 사회다. 위생사회를 구성하는 공간, 컨텐츠 그리고 사람 모두가 곧고, 너르고, 건장하며, 늘씬하고, 맑기를 권력은 꿈꾼다. 이처럼 보기에 좋은 위생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권력은 감시를 동반한다. 위생으로부터의 일탈을 감시하는 눈초리를 갖춘다. 위생사회 유지를 방해하는 일탈의 성분을 면밀히 분석하기 위한 기록이라는 감시 장치, 일탈을 분리해 수용하는 공간적 감시 장치도 동원한다.

위생사회와 감시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가 아니다. 감시는 위생사회 건설을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보기 좋음을 추구하는 위생사회는 감시를 목적으로 삼기도 한다. 보기 좋음은 곧 감시하기 좋음과도 통하지 않은가.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사회가 곧 위생사회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위생사회를 꿈꾸는 권력은 모든 것을 보이게 만든다. 권력의 시선을 피하는 모든 것들을 격리하고 차별한다. 어두운 곳엔 조명을 설치하고, 비위생적인 곳엔 현미경과 내시경을 들이민다. 그리고 모든 것들을 보게 된 순간 위생사회가 완성되었노라고 선언한다.

위생사회와 감시가 한데 엮이는 곳에서 언론은 곧잘 부역 혐의로 걸려든다. 위생사회, 감시사회에 편승하고 있음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언론은 위생적 공간, 위생 콘텐츠, 그리고 위생적 구성원의 생산에 동참하는 적극성을 연출해내고 있다. 웰빙, 몸짱, 얼짱 신드롬의 진원지가 언론이었음을 반성하면 그 혐의는 정당해 보인다. 위생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하는 쪽을 은폐, 격리, 저주하는데 앞장서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언론으로부터 소독내를 맡는 일은 불행한 일이다. 언론은 위생사회, 감시와 권력 네트워크로부터 부단히 탈출하며 위생사회가 인구의 일부분을 위한 일임을 알려주는 땀내를 풍겨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