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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자상 수상자 해외시찰 취재기

'한민족 뿌리찾기' 곳곳에서 감동

해외시찰 취재기  2004.06.23 09: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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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 전남일보 기자





짙은 안개가 걷히자 적을 향해 번쩍이는 칼날을 휘두르며 말 달리는 고구려 장수들이 나타났다. 끊임없는 이민족들의 침탈을 용맹스런 기개로 막아낸 한민족의 영웅들. 705년 동안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지배했던 이들의 힘찬 함성과 말발굽 소리에 잠을 깼다. 5월31일 아침. 필자를 포함해 2003년 한국기자상 수상자 일행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웅대한 기상을 펼쳤던 고구려인의 옛 땅을 밟으며 이들의 흔적 찾기에 나섰다.



이번 여행은 고구려사를 중국의 소수민족사로 귀속하려는 중국의 역사 왜곡작업인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실체를 알리고 나아가 한민족의 뿌리를 찾으려는 취지가 담겨있다. 이런 역사인식 아래 1주일간의 여정은 시작됐다.



우리 일행(12명)은 이날 오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에 도착했다. 연길은 `작은 한국’과 같았다. 눈에 들어오는 곳곳의 우리말 간판에서 이곳이 우리 땅이었음을 직감했다. 연길시를 가로질러 `민족의 영산’ 백두산(2744m)으로 발길을 옮겼다.



등정은 다음날 아침 일찍 시작했다. 20여분간 지프차로 산 정상 가까이에 도달한 뒤 100여m 정도 오르자 천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때묻지 않은 웅장한 순백의 천지를 보면서 만주 벌판을 누비던 `백의 민족’의 기백이 느껴졌다.



6월2일 연변 과기대에서 고구려사 수업을 받았다. 이 대학 양대원(한국사)교수는 “만주지방에 살던 부여족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이 고구려족으로 처음 송화강 유역에 살았다”며 “BC 37년 고주몽이 졸본 부여(지금의 환인)에 고구려를 세웠다”고 했다.



`고구려 흔적 찾기’는 4일과 5일 동북3성 중의 하나인 요녕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4일 오전, 우리는 백암성(중국명 연주산 산성)이 있는 등탑현 관둔촌으로 향했다. 성벽을 타고 올라가 보니 멀리 `태자하’라는 강이 보이고, 성 주위에는 넓은 벌과 산들이 펼쳐졌다.



백암성은 동·서·북 삼면은 돌로, 남쪽은 강가에 깍아 지른 듯한 절벽이 자연 성벽을 이룬 천연 요새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근 봉성시의 오골성(봉황산 산성)은 오르질 못했다. 중국 정부에서 외국인의 출입을 철저히 막고 있어서다. 오골성의 둘레는 1만5천9백55m로 수백개의 고구려 산성중 가장 크며, 요동∼평양간의 최고 요충지였다고 한다.



5일 첫 도읍지인 본계시 환인현을 찾았다. 이곳 졸본성(오녀산성)은 2대 유리왕이 집안의 국내성으로 옮기기까지 첫 수도. 그나마 중국이 일반인에게 공개중인 유적지다. 성 곳곳에선 중국도 인정한 고구려 흔적이 쉽게 발견됐다.



수백여 계단을 오른 후 처음 마주친 고구려 왕궁터. 사기·그릇 등이 많이 발굴됐다는 내용의 영·중문 설명에는 `Koguryo’와 `高句麗’라는 글자가 선명히 기록돼 있었다. 군사 주둔지와 점장대 등 당시 군인들의 흔적도 잘 보존돼 있었다. 점장대 아래에는 동남쪽 멀리서 시작된 비류수(혼강)가 장쾌한 파노라마처럼 가슴에 안겨왔다. 성 중턱쯤에서 성벽과 맞닥뜨렸다. 동문터였다. 길이 420m, 높이 7m의 동문은 고구려의 독특한 축성법인 `옹문’중 가장 오래된 형태로 `고구려 산성’이란 이름이 적혀있어 탯자리임을 실감케 했다.



산을 내려와 미창구 나루터로 향했다. 나루를 건너 언덕에 오르자 남쪽으로 엄청나게 큰 묘가 보였다. 높이 7m, 둘레 144m, 면적 1295㎡나 되는 거대한 장군묘. 동명성왕(주몽)의 묘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직도 조사되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았다.



기행 중에는 연변일보와 요령신문사, 그리고 요령기자협회를 찾아 중국 언론과 중국에서의 조선족 위치, 정체성 등을 알아보는 뜻깊은 시간도 가졌다.



고구려 시대로 시계 추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이 곳엔 지금도 우리 조상의 혼이 숨쉬고 있었다. 이를 지키고 후대에 전해야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고구려사가 잊혀진 과거사가 아닌 현대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