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에서 테러집단에 무참히 꺾인 고 김선일씨의 영혼 앞에 살아있는 자로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오로지 총칼로 제 이념의 푯대를 세우려는 테러집단의 위협 속에서 그가 홀로 감당해야 했을 그 캄캄한 절망의 시간들을 떠올릴 때, 그의 죽음을 위로할 아무 것도 이 지상에는 없다는 것이 절실히 깨달아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전신을 엄습하는 허무와 슬픔을 딛고 제2의 김선일이 나오지 않도록 대비를 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 언론들이 고 김선일씨를 보호하지 못한 정부당국의 무력을 질타하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당국에의 책임 추궁과 향후 대책 촉구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스스로의 보도 자세와 내용이 정당했는지에 대해서도 심각히 자성할 필요가 있다. 나날이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 속에 금세 희미해져 가는 느낌이지만, 김선일씨가 이미 살해된 이후에도 우리 신문들은 그가 살아있다고 대서특필했다. 급히 서두른 개판을 통해 일부 지역에 그의 죽음을 전하는 기사를 내보냈으나 대부분의 지역에는 오보를 전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신문들이 즉각적으로 사과 기사를 싣고 재발방지를 약속한 것은 다행스럽다. 그러나 재발 방지 약속은 무분별한 속보 경쟁이 사라지지 않으면 공언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신문이 속보 경쟁을 지양하고 심층 분석으로 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이미 오래다. 김선일 생존 오보 사건은 속보 경쟁의 타성에 정말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울림 높은 종소리이다.
제작 여건상 오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방송의 경우에도 이번 사건에서 확인되지 않은 미확인 정보를 마구 흘려보냈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김씨 가족의 안방에까지 카메라를 마구 들여보내 일거수일투족을 중계 방송한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대부분의 방송은 김씨의 생존 여부에 일희일비하고, 그의 사망 소식에 오열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것이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본연의 사명이라고 착각하는 듯 했다. 그러나 우리 국민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실신 직전에 있는 유족의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 알권리와 연관돼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눈물의 드라마를 만들어내려는 방송의 선정 보도 관행이 빚어낸 일종의 ‘참극’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이번 사건에서 정말로 반추해야 할 것은 목숨이 경각에 있는 김씨의 신변 사항을 경쟁적으로 보도함으로써 ‘협상보호’의 원칙을 깨트렸다는 것이다. 일본이나 미국의 언론이 동일한 경우에 피해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그에 관한 보도를 자제했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한국기자협회가 자율적으로 마련한 윤리강령이나 재난보도준칙에 이미 상세히 나와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번 기회에 기협 홈페이지 등을 통해 한 번 읽어보고 새겨둘 필요가 있다. 제2의 김선일을 만들지 말라고 정부 당국을 질타하는 것의 진정성은 이렇게 스스로 보도자세를 여밀 때 더욱 높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