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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다시보기] 콩가루 언론-김선일씨 죽음에 대한 보도

언론다시보기  2004.06.30 10: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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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한국언론재단 책임연구위원





장성한 딸이 귀가 길에 끔찍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치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슬픔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한다면, 제대로 된 가정의 모습이다. 그런 다음 범죄자를 원망하면서,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원인들을 짚어볼 것이다. 반대로 가족들이 서로 너 때문이라고 언성을 높이고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범지역이니 이사를 가야한다고 주장하던 아들은 이미 예고된 참사라며 아버지에게 삿대질을 하고, 귀가 시간을 강조했던 아버지는 교육을 못해 일어난 사고라며 어머니에게 호통 친다. 여동생이 늦게 오는데 정류장에 나가지 않았다고 어머니는 아들을 욕한다. 이런 가정을 우리는 콩가루 집안이라고 부를 수 있다.





김선일씨의 죽음에 직면한 한국 사회는 콩가루 집안이었다. 파병을 결정한 대통령, 피랍 상황에서 파병 일정을 확인한 정부, 납치 문의 전화를 무시한 외교부 직원, 현지 대사관, 정보수집기관, 해당 업체 사장 모두가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조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외교안보 라인의 전면적 교체가 요구되기도 했다. 반성과 비판 작업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김선일씨의 죽음에 연결된 서방의 대 아랍정책, 미국의 이라크 침공, 석유, 파병 결정 등 수많은 인과관계의 고리를 외면하자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시기와 방법이다.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함께 슬퍼하고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 함께 분노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외환을 통해 사회공동체가 오히려 강화되는 것이 바로 이런 과정들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 막을 수는 없었는가,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차분하게 따졌어야 했다.





분명한 것은 직접적인 가해자가 김선일씨를 살해한 저항세력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무고한 사람을 참혹하게 죽이는 것을 중요한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지금 비판을 받는 한국 사람 중 누구도 김선일씨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외교부를 비롯한 관련자들은 김선일씨의 피랍 사실, 혹은 그가 살해당할 위험이 높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그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철저하게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흥분된 상태에서, 그리고 많은 것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가정법을 앞세워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는 상황에 쾌재를 부를 사람은 가해자들이다.





나는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언론이 ‘콩가루’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한국 언론은 냉정하고 합리적인 사회적 논의 구조를 마련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참혹한 반인륜적 범죄를 목도하고 흥분한 사람들의 반응을 그대로 반영했다. 더 나아가 언론 스스로도 성급한 비난 대열에 동참했다. 그것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비난의 대상을 달리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응은 9·11 사건에 직면한 미국 언론이 국민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충격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언론은 ‘밀가루’ 기능도 해야 한다. 사회통합 기능은 특히 사회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더욱 요구된다. 이를 위해 언론이 환란 때의 금모으기 운동이나 외국제품 배척 캠페인과 같이 특별한 일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언론은 한 발짝 물러나기만 하면 된다. 충분하지 못한 정보에 근거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그를 바탕으로 서로 손가락질 하는 현실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면 된다는 것이다. 차분하게 사실을 확인하고, 확인된 정보와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구분해서 그에 상응하게 제시하며, 충분한 근거가 있는 비판과 그렇지 못한 비판을 구분하고, 비판들 속에 숨어있는 정치적 의도들을 밝혀서 해설해 주면된다.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가 테러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 주었다. 물리적 보안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에 대응하는 한국 언론의 자세가 더 심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