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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언론인에게 듣는다-리영희 선생 인터뷰

"기자는 권력에 '정절' 팔아선 안돼"

김신용 기자  2004.08.18 14:5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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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폐지·이라크 파병 반대 확고

보수언론, 냉전사고·친미 논조 각성해야





사람들은 리영희 선생(75)을 ‘시대의 양심, 행동하는 지식인’ 등으로 평가한다. 그만큼 그는 진실을 위해 한평생을 올곧게 살아왔다. 그가 1970년대에 쓴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은 당시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겐 필독서요, 계몽서였다. 그는 합동통신과 조선일보에서 베트남 파병의 진실보도를 했다가 두 번이나 해직됐다. 또한 박정희정권에서 전두환, 노태우정권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정권의 감옥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구속되기도 했다.

그가 걸어온 궤적은 오늘 우리 기자들이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질곡의 역사’인 셈이다. 그는 진실보도를 위해선 한 번도 권력과 타협하지 않은 영원한 선배기자였다. 1999년 11월에는 원고마감시간에 쫓겨 새벽까지 글을 쓰다 뇌출혈을 일으켰다. 4년여동안 병마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다행히 지금은 산책도 하고, 말도 또렷이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거동이 활발하지 않다. 매일 쓰디쓴 약도 복용해야 한다. 현재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한 아파트에서 부인과 단 둘이 살고 있는 그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반갑게 악수부터 청했다. 리영희 선생은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동안 정성을 다해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뇌출혈로 쓰러져 사회 활동을 중단한 뒤 선생님의 근황에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바깥을 걸어 다닐 정도로 좋아졌어요. 문제는 머리가 지능적으로 활동을 못하고, 손이 마비돼 글을 쓰지 못하고 있지. 또 기관지가 고장이 났어요. 일체 외부활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원래 성격상 단체나 조직을 이끌어갈 스타일이 아니에요. 단독으로 문제를 뚫고 나가고 사람들에게 시대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역할에 만족해요.



한국기자협회 창립 40주년이 8월 17일 입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기자협회 40년은 반독재 및 민주화 투쟁, 그리고 ‘지난한 역사’였습니다. 기자협회에 한 말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957년에 합동통신에 들어간 뒤 1964년 봄에 조선일보로 옮겼어요. 한국기자협회도 이 때 창립했지요. 문제는 기자협회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문제가 나의문제였어요. (같은 해)11월13일에 ‘아시아, 아프리카 외상회의에서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안 검토중’이란 기사로 반공법위반으로 구속됐는데 기자협회에서 힘을 실어주었어요. 기자협회장이 검사실에 찾아와 항의하고, 성명내고 야단났었지. 덕분에 1개월만에 풀려났지. 더구나 65년에 외신부장이 됐는데 편집인협회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기자협회에 들어갔어요. 나의 사명감은 기자이니까, 또 영원히 기자이니까.



선생님은 60년대 말 조선일보 외교부 출입기자시절,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는 달리 각종 외신과 자료를 수합한 정확한 팩트에 근거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진실보도를 했습니다. 당시 편집국에서 그러한 기사를 게재시키는 분위였는지요.

진실이지요. 기자는 진실을 추구하는 직업입니다. 사실 1966년까지는 김경환씨가 편집국장이었는데, 이분은 철저하게 신문인에 올곧은 자세를 지키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글을 쓸 수 있었어요. 그 때 중국혁명, 제3세계 혁명과정 등도 썼어요. 그러나 1966년 편집국장이 바뀌었는데 이분은 철저하게 극우 반공주의자였어요. 베트남전쟁에 찬양하는 것으로 우리정권과 결탁했지. 그래서 정부, 사주, 편집국장이 나를 싫어했어. 결국 1968년 말에 그만두고 1년동안 노동자 생활을 했지. 당시 소설가 이병주씨와 친했는데 그 양반이 출판사를 내서, 내가 책을 배달했어요. 그런 일로 1년을 보낸 후 1970년에 합동통신사에서 국제부장이 필요하다고 해 들어갔지.



당시 기자로서 힘의 원천과 신념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급합니다.

조선일보 부장직에서 군사독재정권의 모든 거짓에 반대하다 결국 쫓겨나면서 생각했어요. 진정한 언론이라는 것은 거짓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나를 매수하기 위해 물질적, 권력적 유혹을 해왔지만 거절했어. 그러니까 바로 탄압이 시작됐어요. 그래서 ‘진실을 찾아내 우리생활 환경전반을 왜곡되게 의식하고 판단하는 것을 바로 잡아 주어야할 자는 기자다’라고 생각했지. 나는 강자가 약자를 거짓으로 다스리는 그 행위를 범죄행위로 봐. 진실을 추구하는 오로지 한 일념으로 어떠한 고난도 이겨냈어. 진실을 전달하는 것은 매우 값진 것이지. 진실은 나의 신념이요, 삶이라고 생각해요. 기자는 권력에 ‘정절’을 팔면 안돼요. 기자가 사명감을 가진 기자여야 값어치가 있어요.



기자협회는 얼마 전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국가보안법 때문에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는데요. 국가보안법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요.

몇 가지 이유에서 그 법은 폐지돼야 합니다. 첫째 국가보안법은 과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런 극악한 폭력정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법이었어요. 둘째는 그 시대의 냉전적 양극체제의 산물입니다. 셋째 한반도 정세와 남한의 형태를 유지하게 될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세 가지가 모두 변했습니다. 세계 어느 국가에도 그런 악법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그 법이 아니더라도 국가체제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조항을 형법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군사정권이 끝나면서 국내 문예활동이 꽃피었어요. 이는 국민들을 억누르던 억압적, 폭압적 사상말살이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즉 억압이 풀리자 인간적 사유의 지평이 넓어지고, 발상이 자유로워 민족의 정신문화적 가치가 되살아났던 것이지요. 국가보안법이 없어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어요.



언론환경도 이제 ‘통일언론’으로 모토를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선생님처럼 남북문제에 정통한 분도 없을 것 같습니다. 향후 국내언론이 다뤄야 할 남북문제의 방향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반통일적 냉전체제 및 양극체제와 미국이익중심의 세계관을 지닌 그런 신문들이나 신문인들이 이 세계사적인 커다란 변화의 조류에 각성을 해야 합니다. 그들 개개인의 정신적 이념적 ‘본태’가 40년정도의 구태에서 전혀 바뀌지 않고 있어요.

때문에 냉전적 사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변화해야할, 극복해야 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남북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현실적으로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하나하나 착실하게 이성적으로 참을성 있게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을 가르치지요. 이는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남한도 북한이 사회주의적 통일이어야 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남북한 공동체가 내적 성격이 거의 비슷해져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통일이 됩니다. 나는 이것을 ‘수렴적 방식의 남북통합’이라고 했어요.



어느 책에서 선생님의 정신적 스승은 루쉰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루쉰의 철학중 어떤 점에 가장 감명을 받았습니까.

루쉰은 바로 내가 군사정권때 생각했던 것을 똑같이 생각해서 좋아합니다. 당시 중국도 해방후 군부독재와 같은 상황이었지. 루쉰은 억압받는 사람에게 무한한 동정과 공감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의 작품들은 온갖 탄압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 끝까지 민중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했어요. 그 점이 참 좋았어요.



이라크 파병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이라크 파병은 미국과 결부해 난해한 수학 방정식이 필요 한 것 같은데요. 이라크 파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라크 파병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시 지배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현대의 문명적 공통인식을 완전히 역행한 범죄자적 행위지. (이 부분에서 갑자기 사투리가 나왔다. “거기 그렇게 쓰라우”) 지금 미국에서도 절반이상의 국민이 그렇게 생각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켈리도 같은 견해를 말하고 있지. 우리남한 사회에서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군대파견을 지지한 사람들은 정신상태를 감정해야 해요. 현실적 문제로 노무현 정권이 무엇인가 미국에 대해 성의표시를 해야 한다면 꼭 군대를 보내야 되겠어요. 전쟁에 시달린 이라크 국민들의 기아나 건강을 해결해 줄 원조활동을 하면 되는 것이에요. 미국의 체면을 세워주려면 전투병이 아닌 의무대, 공병대만 고집했으면 됐었지요.



후배들과 지인들이 선생님의 건강을 많이 염려합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나 추진하고 있는 일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고마운 일이지. 요즘 고전만 읽고 있어요. 난 이제는 소위 신문·방송을 통해 얻는 정보는 나의 남은 인생에 보탬이 안돼요. 이제는 75년간 걸어온 인생의 책을 접는 중이에요. 인생을 갈무리하는 단계이지.(여기서 선생은 추위는 만성기관지염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습기가 있는 장마철에는 뇌신경마비가 심해져 견디기 힘들다는 말씀을 하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장시간 인터뷰를 해주신데 대해 정말 감사드린다)





■ 리영희 선생 프로필 ■



◇ 1929년 평북 삭주 출생

◇ 1946∼50년 한국 해양대 항해학과 졸

◇ 1950∼57년 군복무, 소령예편

◇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신문대학원 수료

◇ 1964년 ‘아시아, 아프리카 외상회의에서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안 검토중’이란 기사로 반공법 위반 구속

◇ 1965년 조선일보 외신부장

◇ 1968년 베트남전 한국군 파병에 대한 반대입장 기사 등으로 인한 조선일보사 해직

◇ 1971년 위수령철폐요구 64명 긴급선언 서명으로 합동통신사 해직

◇ 1972∼1995년 한양대 사회과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두 차례 해직)

◇ 1989년 한겨레신문 창간기념 북한취재단 계획 관련으로 국가보안법구속

◇ 1993년 통일원 정책평가위원

◇ 1997년 한겨레 비상근이사





대담·정리=김신용 기자 trustkim@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