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열기자 사이에 전해오는 일화 한 토막. H일보에서의 일이다. 교열기자가 출근해 보니 편집국 한편에 ‘교정부는 造物大監’이란 글귀가 써 있었다. ‘해와 달을 바꾸는 권능은 조물주밖에 없느니라…’라는 주석과 함께. 한자를 많이 쓰던 시절에 교열자의 실수로 日자가 月자로 나간 것을 꼬집은 것이다. 이후 교열자에게 조물대감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설이 되다시피 한 60∼70년대 납활자 시대의 얘기다.
기자협회가 40성상을 쌓아오는 동안 기자들이 만들어온 신문의 말도 시간의 축을 타고 명멸해 왔다. 그것은 우리말의 변천과 궤를 같이 하는데, 좋게 말해 시쳇말로 아날로그언어에서 디지털언어로 진화(?)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에는 ‘淸凉里’나 ‘原麥 20萬톤’ 식으로 명사류는 물론 ‘犯하다, 加하다’ 같은 서술어도 죄다 한자로 적었다. 또 기사 첫머리에 으레 따라붙던 ‘측문한 바에 의하면’과 같은 일본어투 말을 ‘들리기론’(지금은 이도 ‘…에 따르면’꼴로 변했다) 식으로 바꿔 쓴 것도 60년대 들어서다.(원로 교열기자이신 민기 선생의 회고)
共和黨을 共産黨으로 개명하고, 社會正義를 社會主義로 둔갑시키며, 장녀를 순식간에 창녀로 만들던 아찔한 사건들도 비일비재했다. 한자와 ‘文選’의 시대에 볼 수 있었던 활자의 마술인 셈이다.
아날로그 시대엔 교열부가 편집국에서 가장 시끄러운 부서였다. 십수명이 앉은 공간에서 여기저기서 동시다발로 ‘게라’(교정쇄)에 박힌 “오징어 윤(允), 쌍길 철(喆)”을 읊어대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목소리에서 밀리면 원고 잡은 선배에게 호된 꾸지람을 당하던 게 편집국 한 귀퉁이에서 벌어지던 풍경이었다. 디지털로 넘어온 뒤론 자판 두드리는 소리뿐 편집국에서 가장 조용한 부서가 됐으니, 이 모두가 지금은 지난 시절의 편린으로만 남았다.
아날로그언어와 디지털언어의 경계선상에는 CTS라는 하드웨어가 자리잡고 있다. 대략 90년대 초중반에 걸쳐 이뤄진 이 기술적 변화는 신문언어의 변신을 가져오는 기폭제가 됐다. 요즘 신문은 한자/한자어의 축소, 이를 대신하는 외래어의 급증, 문어의 구어체화, 한자어 풀어쓰기, 일탈적 어법의 통신언어 등장으로 요약되는 디지털언어의 실험을 진행 중이다.
특히 1997년은 신문언어의 변천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해 말 한국은 ‘외환위기’라는 괴물로 국가부도의 상황으로 내몰리는데, 덩달아 지면에도 낯선 용어와 억지 조어들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이다. ‘빅딜, 워크아웃, 펀더멘털, 모럴해저드’와 같은 외래어를 비롯해 ‘환란(換亂), 弗難집, 錢錢긍긍, 亞찔한 살인’ 식의 약어나 조어 기법들이 급속도로 퍼져나간 게 이 시기다. 그 중에서도 IMF는 아마 최고의 단골손님일 것이다.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IMF사태’니 ‘IMF를 극복’ 식으로 쓰여 당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우리 국민의 정서가 투영됐음을 보여준다.
영문 이니셜 표기 1호로 알려진 JP는 60년대 등장해 40여년을 기자들이 한결같이 애용한 말이다. 그 뒤 DJ와 YS가 합류하고, 많은 정치인들까지 자기도 이니셜로 불러달라고 했으니 활자가 마술을 부린 또 다른 예다. 기자 입장에선 매우 편리한 호칭이었던 이런 말은 당사자들이 무대를 떠난 지금도 위력을 발한다.
‘북풍, 세풍, 안풍…’ 등으로 이어지는 ‘-풍’류어와 수많은 ‘-게이트’ 시리즈, ‘-짱’ 파생어들 이들이 가져오는 신드롬과 주술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진화 중인 신문언어를 곱씹어 보게 한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기자들의 몫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