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계가 DMB 등 다양한 뉴미디어의 등장과 방송위원회의 잇따른 정책발표, 시청자들의 새로운 콘텐츠 수용방식까지 어우러지면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고 있다. 특히 공중파 방송사들은 가입자 수 1천1백만명을 넘어 안정세를 보이고 있는 케이블TV와 최근 방송위의 법개정으로 인해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는 위성방송의 본격적인 공세에 맞서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또한 iTV의 유선방송을 통한 역외재전송이 허가되면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민영방송간 사활을 건 경쟁도 예상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각 방송사는 경영진 뿐 아니라 노조까지 나서서 새로운 방송환경에 맞는 돌파구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다.
방송·통신융합 따른 환경 변화
방송 현업 종사자들은 위성DMB에 따른 방송콘텐츠의 근본적인 변화에는 대부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DMB 관련 업무를 추진해 온 한 공중파 TV 관계자는 “시청자들이 낚시터 같은 곳에서 수시로 스포츠나 뉴스속보를 보는 기능으로 활용을 하겠지만 방송편성이나 제작관행에 큰 변화를 가져오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다른 관계자도 “관련 기기판매나 송수신업에서 파생되는 시장이야 크게 성장을 하겠지만 브라운관으로 방송을 청취하는 습관은 유지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위성방송 등 뉴미디어를 ‘위협’으로 간주하는 의견도 있다. MBC 소속의 한 방송인은 “케이블과 위성방송, 인터넷이 더욱 발전하게 되면 공중파 방송의 위상과 힘이 흔들릴 수 있다”고 예상했다. SBS 관계자는 “위성방송이 수익을 내지 못하고 결국 무너지면 신문시장에서 일고 있는 혼란처럼 방송에도 숨어있던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방송관계자들은 뉴미디어나 새로운 기술이 당장 방송내용이나 편성을 바꾸는 위력은 없겠지만 미국의 경우처럼 통신업체들이 점차 방송과 통신의 경계를 허물고 방송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불안감은 없지 않은 실정이다. 한 공중파 고위 관계자는 미국 방송시장에서 통신업체인 자회사가 모회사인 방송국을 합병한 사례나 콘텐츠 공급업자인 디즈니사가 방송국을 인수한 것을 예로 들며 “방송과 통신의 융합과 콘텐츠로 승부를 겨루는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한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했다.
방송정책의 급격한 변동
방송위원회는 최근 방송계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 있는 일련의 정책들을 말 그대로 ‘쏟아 내고 있는’ 상태다.
방송위는 지난 7월 26일 △시청자의 ‘볼 권리’(시청권)보장 및 방송의 공익성 확보 △매체 간 위상 정립 및 상호 균형발전을 위한 공정경쟁 구도 확립 △지역방송 육성을 통한 방송의 지역성 구현 등을 방송채널정책 운용방안의 정책목표로 정했다. 방송위는 또 위성방송의 공중파 재전송과 iTV 역외재전송 문제를 처리한 것을 필두로 4일에는 DMB를 상용화 한 중국 이동방송의 기술개발 및 추진 현황에 대한 현지 실태조사를 발표하고 이를 향후 추진할 ‘DVB-H 프로젝트’에 반영할 계획도 밝혔다.
11일에도 외주제작 정책 개선과 관련 △지상파방송의 광고매출액이 전체 방송시장의 70%를 상회하는 현실에서 전체 방송구도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으며 △침체상태에 있는 인쇄매체 광고시장을 지상파방송 광고가 잠식할 가능성이 높고 △지상파 DTV 전환 및 지상파 DMB 도입 등에 따른 신규 채널(주파수) 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문화관광부가 추진해 온 ‘외주전문채널’에 대해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혔다.
23일 열린 ‘방송국 재허가 추천 기본방향’ 기자간담회에서 성유보 상임위원은 “방송국 운영성과에 대한 실질적 심사 강화로 재허가 추천의 실효성을 확보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이날 방송위는 재허가 심사의 공통사항으로 향후 3년간 사업계획서에 대한 엄격한 평가, 방송의 공공성·공익성 실현 계획, 조직 및 인력운영 계획 등을 들었다.
특히 방송위는 새 허가자가 방송을 인수인계 할 때까지 취소된 측이 1년6개월 정도의 ‘유예기간’ 동안 방송국 운영을 맡았다가 인계를 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준비한 상태다. 방송위가 이처럼 구체적 대안을 마련한 이유는 그동안 허가취소를 할 경우 바로 방송중단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조건부로 재허가한 사례가 16건에 달하기 때문이다.
최근 방송위의 잇따른 정책발표에 대해 일각에서는 “탄핵방송으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는 몸짓”으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한 방송국 출입기자는 방송위의 강력한 위상을 상기시키며 “설마, 설마 하다가 방송국이 진짜로 (취소를)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송사 대응과 대책
그동안 ‘공룡’으로 불리던 KBS, MBC, SBS등 대형 공중파 방송3사는 변화를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기는 분위기다.
KBS는 이미 전체 조직을 팀제로 정비하고 지역국도 조정을 한 상태. 노조도 일단은 이에 협조를 한다는 입장이다. 일부 중간간부들의 반발도 있지만 KBS의 이런 개혁행보가 공영방송 체제 발전에 근간을 이루는 ‘수신료 인상’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해 대세는 이미 조직의 슬림화로 정해졌다.
SBS의 경우 사측은 통신사업자와의 제휴, 다양한 콘텐츠 활용방안 등을 계속 연구하며 경쟁력이 있는 드라마 등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전략으로 나갈 것으로 보인다. SBS노조는 방송의 공익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14대 개혁과제를 내세웠다. 양측은 10일부터 방송독립을 위한 교섭을 시작했다. 이번 협상에서 사측은 앞으로 강조될 것으로 보이는 방송위의 공익성 강화요구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일정부분 노조 측의 개혁요구를 수용할 전망이다. 또 타 방송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내부단결’을 도출해 내기 위한 방안도 마련할 것으로 관측된다.
최근 방송국들의 동향 가운데 특이한 점은 그동안 방송계를 선도해 왔다고 자부해 온 MBC의 ‘불안한’ 움직임이다. 지난 23일 MBC 노보의 사설격인 ‘한소리’ 난은 개혁적인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다며 현 경영진의 ‘퇴진’ 문제까지 언급해 방송가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는 PD수첩에 대한 제작압력이나 최근 DMB 문제와 관련된 이긍희 대표의 행보에 대한 사원들의 실망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입사 10년차가 넘은 한 MBC 직원은 “우리 조직이 투명하게 아래의 의견이 상부에 전달되는 것은 장점이지만, 위에서 아래 눈치를 보느라 결단이 힘든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한편 수도권 방송으로 새로운 진입을 준비하고 있는 iTV는 내년 1월을 제2의 창사로 여기고 SBS의 ‘틈새’를 노려 시청률 5%대 진입을 목표로 다양한 콘텐츠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iTV의 핵심관계자는 “1년으로 15년의 노하우를 맞상대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고 5%도 선언적 의미”라며 “보도국만 해도 자체적으로 설계해 본 결과 최소한 1백30여명의 충원이 필요한 상태”라고 어려움을 밝혔다.
또 다른 iTV 관계자는 “어떤 계획이라도 대주주의 투자의지가 있어야 실행될 수 있는 것이어서 아직 도약을 확신하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벌이 소유하고 있는 일부 유선방송 PP들과 보도를 중심으로 하는 PP들도 방송계의 지각변동으로 생길 ‘기회’에 대비해 다양한 전략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한 경제전문 PP의 경우는 일반뉴스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방송위와 갈등을 겪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한국방송계는 신문들이 90년대 초중반에 겪었던 것과 같은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