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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 가족 동반자살 슬픈 사연도

'그때 그 시절' 기자들 어떻게 살았나

박주선 기자  2002.08.14 14: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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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로 김장 배추·쌀 받아

폭행 대응 ‘기협 보도지침’도



“5년여의 결혼생활 동안 월급봉투다운 봉투를 받은 적이 있을까. 이번에는 가불을 안했으니 좀 가져올거야 하고 잔뜩 기다리는 날 저녁, 월부값 술외상값 세금 부조금 떼고 가져온 것이 15000원. 그래도 이것이 지금까지 가져온 것 중엔 최고였다. 감지덕지해서 받아들고 결혼 후 처음으로 어머니한테 2000원을 드리고 쌀을 들여놓고 나니 또 몇 푼 안 남는다.”

69년 10월 3일 대한일보 사회부 차장의 부인이 쓴 ‘기자의 월급봉투’ 중 일부다. 96년 2월 16일자에 실린 한국 기자들의 한달 용돈 33만4000원, 샐러리맨 평균 26만9000원보다 많다는 기사와 대비해보자. 가히 격세지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볼까. 취재비 일당 600원, 신문구독료 220원이던 6, 70년대. 경복궁으로 편집국 야유회를 가고, 김장 보너스로 배추를, 창간 기념으로 쌀을 나눠주던 시절이었다. “서울신문사 편집국은 경복궁에서 봄철 아유회를 가졌다. 야유회는 해마다 봄 가을 두 번 걸쳐 갖는다.”(69.6.6) “강원일보사는 지난 11월 김장용 배추를 전사원에게 지급했다.”(72.12.15) “문화방송 경향 통합 창간 3주년 기념으로 전사원과 전속단원 1700명에게 축하선물로 쌀 한가마니씩을 나눠주었다.”(77.12.1)

박봉에 시달리고 기자 폭행에 대응하기 위해 ‘기자협회 보도지침’을 만들던 우울한 모습도 보인다. “동아일보 마산 주재기자, 생활고로 부인 아들과 함께 자살/월봉 17000원을 가지고 부인과 4남 1녀가 생활해왔다.”(69.11.7) “출입기자가 연행 구속 폭행 당하면 출입처 기자들이 각각 소속사로 기사를 송고하고, 내근 기자와 데스크에 대해서는 기협이 각 소속사로 사건을 기사화하여 배부하기로 했다.”(71.11.12)

유신, 5공 정권을 거치면서 정권에 아부하거나 탄압받던 일들도 그 시절 기자들의 자화상이다. “해직과 복직/나는 시계를 흘끔흘끔 보며 뛰어가는 봉급장이들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출근할 곳만 생겨봐라. 내 새벽부터 밤중까지 손발이 부르트도록 뼈가 닳아빠지도록 일을 하고야 말겠다(조선일보 월간조선부 차장).”(84.9.7)

언젠가 ‘그때 그 시절’로 비춰질 2002년 오늘 기자들의 삶은 어떻게 기록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