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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빠진 명분의 '칼부림'

김기봉 YTN 기자  2004.10.06 09:5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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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봉  
 
장병들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방탄헬멧! 그러나 방탄능력이 형편없는 저질 헬멧을 만든 국방부! 필경 연상되는 개발업체와의 검은 유착! 그런 비리를 파헤치려는 MBC ‘사실은…’팀의 투철한 기자정신! 그런데 오히려 국방부를 감싸고도는 관제언론 YTN…!

MBC ‘사실은…’팀이 지난 한달여 동안 많은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켜 논 논리의 기본 구도다. 이미 ‘죽일 놈’으로 작정하고 날이 선 칼을 높이 쳐든 마당에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는 따위의 진언이 들릴 리 없다.

더 나아가 ‘사람이 바뀌었다’라는 외침조차 듣지 않으려는 판국에 이른 것이다. 이른바 방탄헬멧 논쟁에서 나 자신과 YTN은 처음부터 무거운 돌덩이를 지고 뛰어야 하는 100미터 달리기 선수였다. 여론의 지지와 인기를 얻기에 더 없이 ‘쌈빡한’ 명분을 ‘감히’ 거스르는 주장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관제언론으로 매도하는 외부의 비난도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달리고 싶은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달릴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에 대한 회의와 괴로움이 더 컸다.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언론 본연의 모습일진대 결과적으로 그 반대의 위치에 서게 됐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명분이기 때문에 잠자코 침묵하면 그 큰 흐름에 편히 합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서 진실이 ‘거짓’으로 굳어져 가는 현실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더욱이 논쟁의 대상이 장병들의 생명과 연관되는 방탄장구인 만큼 관련 보도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은 너무나 크다는 사실도 나를 독려하는 의무감으로 작용했다. 문제가 있는 헬멧을 문제가 없는 것으로 국민들이 알고 있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문제가 없거나 나름대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는 헬멧을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물건으로 잘못 아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MBC ‘사실은…’의 ‘구멍난 방탄장비’는 현란한 편집과 말초 신경을 파고드는 접근 방식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장비의 실체를 밝히는 부분에서는 속 빈 강정이었다. 적어도 헬멧에서는 말이다. ‘사실은…’팀이 ‘문제가 있다’는 기획의도에 집착한 나머지 보도의 방향과 달리 나온 국방부의 1차 공개실험(8월 27일) 결과를 보도하지 않은 것 까지는 비슷한 ‘애환’을 안고 사는 동종업계의 아량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도하지 않는 ‘쌈빡한’ 명목을 찾기 위해 공정하게 진행된 실험자체를 ‘눈속임 실험’으로 규정해 보도한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범죄행위’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시청자들이 분노해 잠 못 이룬 것도 바로 이 보도 때문이었다. 헬멧 성능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국방부가 국민을 속이기 위해 가짜 실험을 했다는 그 보도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 ‘가짜 실험’결과를 ‘그대로 받아 쓴’ 김기봉과 그 회사 YTN도 함께 ‘죽일 놈’의 명단에 자동으로 등록된 것이다.

이미 윤리의 마지노선을 넘어서 버린 ‘사실은…’팀은, 진실을 말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공개실험 (9월 24일) 결과조차 결국 외면한 채 본질과 관계없는 인신공격성 비난과 여론몰이에만 열을 올렸다.

공개실험 현장에서 ‘사실은…’팀의 행동을 지켜봤던 여러 기자들의 말처럼 ‘비애를 느낀다’는 표현 외에 나 역시 별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언론 보도에 명분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명분이 크고 중요할수록 그 명분을 위해 휘두르는 칼날의 상처 또한 깊다. 때문에 명분의 칼날은 그 무엇보다 정확한 사실관계의 바탕 위에서 휘둘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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