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위원장 호소문* 오늘은 웃을 일이 있으셨는지요. ‘공정보도위의 제안’을 쓰려다 이렇게 우울한 호소문을 띄웁니다. 최근 신문 제작에 난감한 일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간 신문의 논조를 두고 오른쪽으로 가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느 한 쪽으로 가자는 데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 시간을 두고 진득하게 얘기해보자고 양쪽을 얼렀습니다. 그게 헛일이었나 봅니다. 이런 단어들을 기억하십니까? 언론의 공적 기능, 편집권, 신문윤리강령, 언론 통제, 내부 검열…. 작금의 사정은 그렇게 뽀얀 먼지가 앉은 낱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문의 이상을 재론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된 마당에 솔직해집시다. 이 땅의 모든 신문들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긴장 견제 대립관계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우리 신문도 그렇습니다. 그 중에 경제권력과는 한번도 실질적으로 충돌한 적이 없습니다. ‘친(親)기업’, 혹은 ‘경제 우선’의 논조는 애시당초 새로운 의제가 아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신문 자체의 생존적 필요에 따라 정치권력을 활용해왔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좌냐 우냐’라는 선택을, 그것도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강요’당한다는 것입니다. 뉴스의 1차 생산자로서 신문이 지녀왔던 특권은 이미 뉴미디어 시대에 접어든 현실에선 유지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신문이 제값을 받아내기 어렵습니다. 이를 타개하는 노력에 온통 매달려도 모자랄 판인데, 우리 신문은 주력하는 힘의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현상이 좌이건 우이건 신문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구독자 감소에 한 몫 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겸허하게 숙고해봐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언론의 정도(正道)입니까. 누구를 위한 정도입니까. 지금 언론계는 물론 온 사회가 이분법에 포획돼 있습니다. 우리 신문의 내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분법이 몰고온 공포가 여실합니다. 무시로 편집방침이 내려오고, 순식간에 신문의 모양새가 바뀝니다. 기자들과 데스크들이 알아서 자기검열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중층, 중도, 중간, 조정, 타협…. 이런 류의 단어들은 무력하기만 합니다. 기자로서의 직업적인 자긍심이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른쪽과 왼쪽 모두를 거부한 것은 우리 신문은 그 극단의 독재, 실제 자유주의 민주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논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리적으로 판단해도, 그 어느 쪽을 선택한들 이미 선점한 매체들 틈에서 우리가 제 값을 받을 리는 만무합니다. 우리가 독자적인 지형과 목소리와 독자를 얻어내는 길은 생산적인 의제 조율과 타협의 언로(言路)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 한국 사회에 필요한, 언론이 마땅히 해야하는, 그렇지만 모두가 저 목소리만 키울뿐 방기하고 있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에서 만큼은 우리 신문이 작지만, 단단한 응원군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사익의 논리로 전체의 명예와 이해에 영향을 끼쳐서도, 그렇다고 전체가 개인의 사유를 강제해서도 안된다.” 미국 자유주의의 시조로 추앙받는 토마스 지퍼슨의 말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제발 ‘막다른 선택’에 이르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호소문이 서로의 의지를 탈각시키지 않으면서 공생의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만의 신문도 나만의 신문도 아닌, 우리의 신문이지 않습니까. 다음에는 사설과 기사의 논조 일치 문제에 대해 졸견을 말씀드리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