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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편집원칙 도대체 뭔가"

공보위 4면 걸쳐 사설․시론 등 편집 문제점 지적
노조위원장 호소문 "편집위원회 부활 시켜야"

차정인 기자  2004.10.07 19: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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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공정보도위원회가 만평 누락, 지면의 논조불일치, 사실관계 불일치 등 편집방향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강하게 표출하면서 문화 사내 전반이 술렁이고 있다.



문화 공보위는 7일 발행한 ‘공정보도’에서 4면에 걸쳐 ‘편집원칙’, ‘사설과 시론 분석’, ‘논설실장 인터뷰’, ‘편집위원회 부활’ 등에 대한 구성원들간 의견 및 문제점을 지적했다.



특히 5일, 7일 ‘논조와 불일치하다’는 이유로 누락된 ‘만평’에 대해서도 담당 화백의 입장을 게재했다.



공정보도는 1면에서 “편집원칙 도대체 뭔가”라는 제목으로 “편집국의 편집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만드는 것인가. 최근 벌어진 일련의 문화일보 편집국내 기사누락과 축소편집 사태를 계기로 편집권의 주체와 행사방법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고 밝혔다. 또 “김종호 편집국장은 7일 오전 11시쯤 이재용 화백의 만평을 3.5판부터 뺄 것을 지시, 3면 하단이 긴급히 경제부 출고기사로 대체됐다”며 “김 국장은 지난 5일에도 이 화백의 만평을 빼고 am7 사진광고로 대체시켰다. 화백의 만평이 2번이나 연속 누락된 것은 문화일보 창간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공정보도 1면은 ‘뉴스판단 결정 국장이 사장실 다녀와서’, ‘편집권 내논 간부들에 무엇을 기대할지’ 등의 편집국 기자들의 반응을 연차별로 소개했다. 1면 사이드박스에는 노조위원장의 호소문을 게재하고(기사하단 전문) “이분법서 벗어나자”는 내용을 담았다.



공정보도는 2면에서 8~9월 사설과 시론 내용을 분석한 결과 “사실관계 불명확-오류 많다”며 ‘전문성 실종’, ‘여과되지 않은 편향성’, ‘절제없는 감정이입’ 등 문제점이 있는 사설 및 시론을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지적했다.



공정보도 3면은 홍정기 논설실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게재했다. 인터뷰에서 홍 실장은 ‘조중동문’이라는 신조어에 대해 “사안에 따라 같은 주장 펼때도 있다”고 답했고 국보법 폐지 반대로 비쳐지는 점에 대해 “‘개정론’이 입장”이라며 “오해 샀다면 잘못”이라고 밝혔다. 또 사설 칼럼 오류 검증장치가 없다는 것에 대해 “옴부즈만제 도입 반대할 이유 없다”고 밝혔다.



“편집위원회 부활시키자”는 내용의 4면은 노조의 ‘편집제작협의회’와 ‘편집위원회’의 부활 주장에 대해 “사측이 명확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며 편집위 운영 타사 성공사례와 함께 실었다.



이와 관련 편집국 기자들은 공보위의 직접적인 지적들에 대해 술렁이고 있는 표정이다. 편집국 한 기자는 “만평 누락이 그동안 쌓여있던 불만들을 드러내고 있다”며 “사장이 편집권에 직접 관여하는 것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자는 “문화일보를 일컬어 ‘독립언론’이라고 말하던 때도 있었지만 일련의 편집 논조를 보고는 의욕이 상실되고 있다”며 “이제는 ‘항복언론’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문화 오승훈 노조위원장은 “하고 싶은 말들은 이번 공정보도에서 했다”면서 “앞으로 계속해서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가면서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노조위원장 호소문*



오늘은 웃을 일이 있으셨는지요. ‘공정보도위의 제안’을 쓰려다 이렇게 우울한 호소문을 띄웁니다.



최근 신문 제작에 난감한 일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간 신문의 논조를 두고 오른쪽으로 가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느 한 쪽으로 가자는 데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 시간을 두고 진득하게 얘기해보자고 양쪽을 얼렀습니다. 그게 헛일이었나 봅니다.



이런 단어들을 기억하십니까? 언론의 공적 기능, 편집권, 신문윤리강령, 언론 통제, 내부 검열…. 작금의 사정은 그렇게 뽀얀 먼지가 앉은 낱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문의 이상을 재론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된 마당에 솔직해집시다. 이 땅의 모든 신문들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긴장 견제 대립관계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우리 신문도 그렇습니다. 그 중에 경제권력과는 한번도 실질적으로 충돌한 적이 없습니다. ‘친(親)기업’, 혹은 ‘경제 우선’의 논조는 애시당초 새로운 의제가 아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신문 자체의 생존적 필요에 따라 정치권력을 활용해왔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좌냐 우냐’라는 선택을, 그것도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강요’당한다는 것입니다. 뉴스의 1차 생산자로서 신문이 지녀왔던 특권은 이미 뉴미디어 시대에 접어든 현실에선 유지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신문이 제값을 받아내기 어렵습니다. 이를 타개하는 노력에 온통 매달려도 모자랄 판인데, 우리 신문은 주력하는 힘의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현상이 좌이건 우이건 신문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구독자 감소에 한 몫 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겸허하게 숙고해봐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언론의 정도(正道)입니까. 누구를 위한 정도입니까.



지금 언론계는 물론 온 사회가 이분법에 포획돼 있습니다. 우리 신문의 내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분법이 몰고온 공포가 여실합니다. 무시로 편집방침이 내려오고, 순식간에 신문의 모양새가 바뀝니다. 기자들과 데스크들이 알아서 자기검열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중층, 중도, 중간, 조정, 타협…. 이런 류의 단어들은 무력하기만 합니다. 기자로서의 직업적인 자긍심이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른쪽과 왼쪽 모두를 거부한 것은 우리 신문은 그 극단의 독재, 실제 자유주의 민주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논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리적으로 판단해도, 그 어느 쪽을 선택한들 이미 선점한 매체들 틈에서 우리가 제 값을 받을 리는 만무합니다.



우리가 독자적인 지형과 목소리와 독자를 얻어내는 길은 생산적인 의제 조율과 타협의 언로(言路)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 한국 사회에 필요한, 언론이 마땅히 해야하는, 그렇지만 모두가 저 목소리만 키울뿐 방기하고 있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에서 만큼은 우리 신문이 작지만, 단단한 응원군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사익의 논리로 전체의 명예와 이해에 영향을 끼쳐서도, 그렇다고 전체가 개인의 사유를 강제해서도 안된다.” 미국 자유주의의 시조로 추앙받는 토마스 지퍼슨의 말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제발 ‘막다른 선택’에 이르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호소문이 서로의 의지를 탈각시키지 않으면서 공생의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만의 신문도 나만의 신문도 아닌, 우리의 신문이지 않습니까.

다음에는 사설과 기사의 논조 일치 문제에 대해 졸견을 말씀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