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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수 만평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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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신문 논조가 왔다갔다해서는 안 돼'
-화백 '작가는 독창적인 해석 내릴 수 있어야'
문화일보 만평 누락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이번 문화만평 사태는 표면적으로 문화 편집국장과 화백의 각종 현안에 대한 시각차가 가져온 결과이지만 그 이면에는 신문의 ‘의제설정권’과 관련한 전통적인 시각과 새로운 시각이 충돌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충돌은 최근 세계일보에서도 일어난 바 있고, 현재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신문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진지한 접근이 요구되고 있다.
편집국장의 입장
편집국장은 해당 신문사의 ‘의제설정권’을 사실상 독점해 집행하는 위치에 있다. 정상적인 신문에서 1면 머리기사의 내용이나, 전체적인 논조가 편집국장의 의사와 다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이 같은 편집국장들의 권한은 ‘직선제’ 또는 ‘임명동의제’와 같은 선출과정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기도 하고, 오랜 세월에 걸친 소속원 간의 검증을 통해 ‘탁월한 능력’을 가진 선배의 시각이라고 추인 되기도 한다. 편집국장에게 주어진 이러한 권한은 당연히 책임을 수반한다. 독자들이 특정 기사에 대해 의견이 있을 때 편집국장을 먼저 찾는 이유는 이것이다.
편집국장의 입장에서 볼 때 신문의 논조는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전체적으로 같아야 한다. 동일한 사안에 대한 한 신문의 논조가 1면 머리기사는 왼쪽으로, 만평은 오른쪽으로, 사설은 중간으로 흐를 수는 없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견해차가 ‘문화만평’ 사태의 본질이다.
또한 편집국장의 시각에서는 만평도 기사의 일종이고, 시사만화가도 기자와 같은 편집국 구성원이란 점에서 “특정 기자가 쓴 기사에 문제가 있을 경우 수정되거나 삭제되는 것과 같이 시사만화가가 그린 만평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갖는다.
그 결과 편집국장은 전체적인 논조와 다른 만평을 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이를 두고 외부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편집권 침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시사만화가의 입장
전통적으로 시사만화는 해당 신문사의 논조를 가장 집약시켜 보여주는 역할을 해왔다. 만화에 허용된 풍자, 과장 등의 방식을 통해 시국 현안에 대한 자사의 이데올로기, 지향점 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기능을 담당했다는 말이다. 지금도 ‘조중동’의 시사만화는 이러한 전통에 충실하다.
전통적인 시사만화가는 스스로의 게이트키핑을 통해 자사의 논조와 자신의 만평을 일치시킨다. 이러한 자세가 바람직한 것인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전통적 입장에서 시사만화가가 회사의 논조와 다른 만평을 게재하거나, 편집국장의 의제설정권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른바 ‘386 시사만화가’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 시사만화가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우선 시사만화가도 독자적으로 의제설정을 할 수 있다고 이들은 믿는다. 비록 자신이 소속된 신문사의 전체적인 논조를 좌우할 수 없더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제작되는 ‘4칸’ 또는 ‘한 칸’ 이라는 공간에서만큼은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들은 자신들이 단순 ‘삽화가’가 아니라 창의력을 발휘해 독창적인 해석을 내리는 ‘작가’라는 것에서 정체성을 찾는다.
‘386 시사만화가’들이 이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게 된 것은 시장의 반응을 직접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요즘 수용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만평을 보고, 그 반응을 ‘댓글’이란 형식으로 즉시 표출한다. 즉 편집국장에게 비판받은 ‘작품’이었다고 하더라도 네티즌에게는 호평을 받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젊은 시사만화가’들은 편집권이란 편집국 구성원들이 나눠 갖고 있으며 따라서 구성원이면 누구나 의제설정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결과 편집국장이 일방적으로 만평을 누락시키는 것은 일종의 ‘횡포’ 또는 권한의 과잉사용이라고 인식한다.
향후 과제
사실 직업인으로서 시사만화가는 태생적으로 모순적이며 논쟁 유발적이다. 시사만화가는 편집국에 소속돼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 회사원이기도 하고, 창의력이 보다 중요한 가치로 평가되는 ‘작가’ 이기도 하다. 규범적이기도 하고 리버럴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 시사만화가들이 처한 정체성의 이중구조다.
시사만화가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긴 하지만 공통적인 부분은 있다. 바로 시사만화는 매우 전문적인 영역이란 점이다. 만화라는 텍스트를 통해 시사현안을 비평하고 논평하는 작업이니 전문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문화만평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점이 충족돼야 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우선 각 당사자가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아야 한다. 시사만화가는 편집국장의 입장을, 편집국장은 시사만화가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대화를 해야 한다. 이때 외부 단체를 끼어들이는 것은 현명치 못할 수도 있다. 내부 문제에 대한 외부의 중재는 그 자체로 논란거리이기 때문이다.
편집국장의 입장에서는 특정 만평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나 해석이 과연 정답인가하는 질문을 부단히 던져봐야 한다. 어차피 만화란 기호는 드러나는 의미 이외에 숨어있는 의미가 있는 등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복잡하다. 그 결과 수용자의 입장에서 화백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만평을 이해하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실제로 사설을 오해하는 독자는 없지만 만평을 오해하는 독자는 많다. 그것이 글과 그림의 태생적 차이점이다. 팩트를 생명으로 하는 일반 기사와 만평이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여기에서 찾아진다.
한편 이번 사태의 해결 여부와 상관없이 다음과 같은 문제는 여전히 한국 신문사 편집국이라면 공통적으로 부딪히게 될 문제로 남게 될 전망이다.
△신문사 논조와 다른 만평을 어떻게 볼 것인가? △편집국장의 의제설정권에 대한 독점(또는 과점)은 불가피한 것인가? △편집국 내에서 시사만화가와 만평이 갖는 특수한 위치를 인정할 것인가? △만평을 통한 시사만화가의 독자적 의제설정은 수용될 수 있는 과제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당연히 편집국 각 구성원들의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참여가 수반돼야만 보다 올바른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