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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사진 '선정주의' 지나치다

섹시하지 않으면 관심 안 가져...
"이형택이 성전환수술을 해야 하나" 탄식

곽윤섭 기자 (한겨레 21 사진팀)  2004.12.06 18:4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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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신문 지면에 나온 ‘선정적인’ 샤라포바의 사진 모음.  
 
  ▲ 각 신문 지면에 나온 ‘선정적인’ 샤라포바의 사진 모음.  
 
메이저대회에선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지만 신문지면에 사진이 가장 많이 등장했던 여자 테니스 선수 한명을 꼽는다면 단연 안나 쿠르니코바를 들 수 있다.



미인대회에서도 우승자가 더 각광을 받는데 승패에 관계없이 쿠르니코바는 대회에만 출전하면 지면에 사진이 실렸다. 한번쯤 우승이라도 했으면 덜 민망했을 법도 했지만 끝내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쿠르니코바의 사진이 그렇게 빈번히 실렸던 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그가 ‘섹시’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사진을 선정하는 기준도 미인대회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공을 가지고 하는 스포츠 사진에선 공의 유무가 사진선정의 한 기준이 된다. 굳이 예를 들자면 축구사진에선 공을 다투는 선수들의 사진엔 공이 있는 것이 좋다. 슛을 성공시킨 후의 반응과 뒷풀이 장면이라면 다르다. 공이 없더라도 표정과 몸짓의 역동성이 사진선정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테니스사진이라도 위의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 믿어왔다.



힘 있게 공을 후려치는 라켓이 경기에 몰입한 얼굴표정과 같이 잡히는 사진이 좋다고 생각했고 공을 놓쳤더라도 역동적인 스윙이 표현되었다면 나쁘지 않다고 본다. 이 역시 경기 후 기뻐하거나 화를 내는 사진이라면 굳이 공이나 라켓까지도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안나 쿠르니코바의 경우엔 잣대가 달랐다. 얼굴이 잘 나오거나 가슴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스커트가 휘날리는 사진이 있다면 공이나 라켓 따위는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스포츠관련 기사를 보도하는 면에 그런 사진이 등장하는 것은 해외토픽 사진이라며 속이 보이는 패션사진이 지면에 나오곤 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어 사진기자로서 마음 한구석이 자못 찜찜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 면죄부를 주는 스타가 등장했다. 권위 있는 윔블던대회에서 서리나 윌리엄스를 제압하고 당당히 실력으로 챔피언에 등극한 선수가 ‘섹시’하기까지! 게다가 그런 선수가 한국의 대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더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한국의 신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첫 경기를 가진 28일의 샤라포바를 보도한 각 신문들 사진에선 샤라포바는 더 이상 테니스 선수로 보이지 않는다. 공이 없음은 물론이고 라켓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사진엔 그의 긴 다리와 가슴이 있을 뿐이다. 9월 30일자 스포츠면에 샤라포바를 다룬 몇몇 신문은 하나같이 연합사진을 실었다.



연합뉴스는 이날 샤라포바의 경기 사진 13장과 관중위주의 스케치 사진 4장을 사진뉴스 서버에 올렸다. 경기사진 중 6장이 공은 없고 가슴이 강조된 사진이었다. 나머지 7장중에서 2장은 관중에게 답례하는 피쳐 사진이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운동감이 있는” 스포츠 사진도 백핸드로 공격하는 2장을 포함해 5장이 있었다. 이날 많은 일간지와 스포츠신문들이 모두 연합이 제공한 “가슴이 강조된” 샤라포바 사진을 썼다. 지난 11월 24일 한국사진기자협회는 샤라포바의 “가슴사진”중 하나를 이달의 보도사진 스포츠부문 우수상으로 선정했다.



샤라포바는 한국을 떠나 일본과 스위스에서 열린 대회에 연속 참가했다. 한국에서 열린 경기만큼은 아니지만 독자의 관심은 살아있었고 이따금 그의 경기사진은 한국 신문의 지면에 등장했다. 그러나 “한결 점잖아 졌고 스포츠정신에 입각” 한 사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과 스위스, 그리고 미국대회동안 외신이 보낸 사진을 검색해보면 그럴만한(?) 사진이 별로 없다. 힘이 있거나 셔터타이밍이 절묘하거나 빛을 잘 이용한 사진들이 주로 공급되었다.



샤라포바의 열풍이 지나간 뒤 각 언론들은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샤라포바를 비롯하여, 정상급의 선수들을 초청한 한솔 코리아오픈대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어 전국적으로 테니스 붐이 조성될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샤라포바만큼 외모가 뛰어난 한국 여자선수가 짧은 치마와 가슴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티셔츠를 입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테니스 붐이 일어날 것 같지가 않다.



11월 3일 연합뉴스는 전한국 테니스선수권에 출전한 이형택이 텅 빈 관중석을 배경으로 경기하는 사진을 꽉 찬 관중 앞의 샤라포바 모습과 나란히 붙여 서버에 올렸다. 이형택은 세계무대에서도 선전하는 한국테니스의 간판이다. 테니스열기가 살아날 기틀이 마련되었다면 국내대회 출전을 감행한 이형택의 경기에 어느 정도는 관중이 몰려야 한다. 그런데도 그렇지 못한 이유는 이형택이 샤라포바 보다 세계랭킹이 낮은 탓이 아니라 섹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형택이 유에스 오픈을 우승하고 와서 한국에서 경기를 한다고 해도 성전환수술을 하기 전까진 관중몰이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책임은 여자테니스선수를 남자경기처럼 힘과 기술로 평가하지 않고 가슴의 깊이와 몸매로 잣대를 삼는 몇몇 신문들에게도 있다. 사진을 본 독자들이 “테니스 잘 치는구나” 가 아니라 “꿀꺽”이라는 반응을 보이게 하는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로 모처럼 찾아온 테니스 붐 조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