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담당 기자들은 시즌종료를 손꼽아 기다린다. 3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고 야근을 밥먹듯 해야 하는 야구기자들은 서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가을이 오면 봄을 맞는 처녀처럼 가슴이 설렌다. 박찬호 등 해외파들의 등장으로 최근 몇년간 오프시즌에도 바쁘게 돌아갔지만 그래도 이번 만큼은 조용히 넘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겨울이 시작되면서 이같은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10월 말 해태 김응룡 감독이 삼성 사령탑으로 옮기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알쏭달쏭한 김 감독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스포츠지 4개사의 입장이 엇갈렸다. 소리없는 정보전쟁이 펼쳐졌다. 김 감독 파동이 가라앉자마자 한일슈퍼게임이 일본에서 펼쳐졌다.
기자들이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느닷없이 프로야구선수협의회(약칭 선수협) 파동이 터졌다. 한일슈퍼게임 때 나돌았던 소문이 사실로 판명됐다. 양준혁 송진우 박정태 등 간판 스타들이 선수협을 추진했다. 파장은 엄청나게 컸다. 프로야구판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기자들은 발이 닳도록 현장을 쫓아다녔고 심야취재를 했다.
“선수회가 구성될 경우 야구를 안하겠다”는 박용오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의 경고발언에도 불구하고 선수협은 21일 여의도 63빌딩 별관 체리홀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막판까지 자리를 지킨 75명이 선수협을 결성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기자들의 속이 바짝바짝 탈 수밖에. 오후 8시까지는 선수협 발족은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회의장에 모인 8개 구단 대표들은 타선수들의 도착을 기다리며 농성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9시가 되자 선수들이 속속 입장해 10시쯤에는 숫자가 114명으로 불어났다. 다시 자정을 넘기면서 대표들의 내분으로 삼성 LG 현대 선수들이 떠나 썰렁한 분위기. 남은 선수들은 다음날 새벽 1시 45분 일단 선수협을 발족시키기로 결의했다. 반쪽으로 탄생했다는 것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이날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데스크에 보고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고 내근자들도 판마다 기사를 바꿔쓰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야근이 끝났다. 출근한 지 20시간이 지나서야 퇴근했다. 회사 주변 술집들이 모두 문을 닫은 시간. 그냥 헤어지기가 섭섭해 포장마차에서 한 잔을 걸친뒤집에 도착한 시각이 5시 30분. 그날 따라 왜 그렇게 춥던지.
그러나 이것은 취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선수협과 KBO는 마주 달리는 열차였다. 선수협은 세불리기에 나섰고 KBO와 각 구단은 가입 선수들을 탈퇴시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그 과정에서 현대 선수 42명이 집단 가입했다가 다음날 전원 탈퇴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탈퇴선수가 늘었지만 핵심 인물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KBO와 구단은 밀리면 끝장이라는 자세로 강경일변도로 나왔다. 이사회는 선수협 참가 선수와는 재계약을 하지 않고 자유계약선수로 풀기로 결의했고 구단들은 선수협 추가 가입을 막고 탈퇴를 유도하기 위해 당초 일정보다 앞당겨 서둘러 전지훈련을 떠났다.
선수협도 사무실까지 얻어 장기전에 대비했다. “공개된 장소에서 비밀투표를 실시, 선수들의 의사를 물을 생각도 있다”며 역공세를 폈다.
선수협 대표들과 반대 선수들도 기자회견을 통해 서로를 비방했다. 선수들 간에도 씻을 수 없는 앙금이 남게 됐다. 선수협 문제가 일단락되더라도 스타들은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선수협 반대 기자회견을 가진 이승엽은 팬들의 비난에 눈물을 뿌렸고 가입 하루만에 탈퇴한 정민태는 구단의 권유로 서둘러 전지훈련을 떠났다.
스포츠서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수협 지지라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다. 선수협은 시대적인 요청이고 KBO와 구단은 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며 어정쩡한 양비론을 거부했다.
스포츠서울은 선수협 출범 당일 초판에 “선수협은 구성돼야 한다”는 제목의 이종남 부국장의 칼럼을 1면 사이드와 2면에 걸쳐 게재, 노선을 확실히 했다. 선수협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입장표명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KBO가 선수협을 인정하고 대화상대로 맞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KBO와 각 구단의 어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단이 대규모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 선수협 구성을 막을 명분이 되지 못한다는 게 스포츠서울 기자들의 생각이었다. 적자기업이라고 노조를 만들지 말라는 법이 없듯이. KBO와 각 구단 직원들로부터 “너무 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들어야 했지만 야구팬들의 지지는 실로 대단했다.
선수협 파동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규시즌이 파행으로 치닫지 않아야 할텐데 전망이 밝지 않아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