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 남대문 서울지검 대검 법무부 국회 총리실…. 그 동안 아침이면 눈 비비면서 출근하던 기자실이다. 전기장판에 몸을 뉘고 때에 찌든 군용담요를 덮으면 간밤의 숙취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전담 여직원이 배치돼 전화도 받아주고 엠바고니, 풀 기사니, 점심 약속이니 일일이 챙겨주는 1진 기자실에서 당직자회의 발언록이 배포되는 정당 기자실까지…. 2진에서 1진으로, 또 이른바 하원에서 상원으로 황감하기 짝이 없는 기자실의 상승이었다.
기자실이라면 물먹고 허둥대던 참담했던 경험과 동시에 이런저런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 나로서도 기자실 제도 개혁론에 손사래를 칠 이유도 그럴 의향도 없다. 그러나 일각에서 얘기하는 기자단의 적폐 때문이 아니라 출입기자라는 제도가 시대와 정보의 흐름에 뒤쳐지면서 과거에 비해 효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하는 이유에서다.
경험하고 목격한 것만 갖고 판단하더라도 출입기자, 넓게는 ‘기자의 특권'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맑고 투명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론계 내부의 끊임없는 자정노력이 성과를 거둔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자실이 마치 ‘권력과 언론이 유착하는 통로'인양 비춰지고 언론개혁의 제1대상인양 부각되는 것은 현재 기자실의 모습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사실 기자실 개방은 그 동안 기존 기자단 구성원간에도 시간 문제일 뿐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기자실을 운영하는 정부부처에서 사무실과 공간의 사정을 고려하고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해 특정사의 출입여부를 결정하면 되는데 “기자단의 결정에 맡긴다”며 사실상 그 책임을 기존 언론에 떠넘긴 측면도 부정하긴 어렵다.
또 출입기자단 제도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기득권의 배타적인 유지가 일그러진 얼굴이었다면 부실언론과 함량미달 언론인의 양산을 제어하는 기능을 함으로써 언론이 스스로 품격을 지킬 수 있는 기제로 작용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자실 개방이 시대적 대세라 할지라도 지속적인 취재가 가능할 정도로 언론관과 인적·물적 기반을 갖춘 언론사인지, 기본적인 자질을 훈련받은 언론인인지 따져보는 최소한의 규준은 적용돼야 한다고 본다. 이런 과정과 절차를 거쳐 기자실이 개방된다면 누구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기자등록제와한쌍으로 논의되고 있는 브리핑룸제의 경우 선진적인 외형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언론 환경에 미국적 형식의 차용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장관을 비롯한 관료들이 브리핑을 제대로 할 것인가? 공보담당자들이 미국 백악관과 국무성의 대변인처럼 정책의 내용과 흐름을 꿰뚫고 기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물 흐르듯이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 관료사회의 정책 결정과정이 공보담당자의 개입을 허용할 정도로 개방됐는가’라는 질문에 이렇다할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브리핑룸제는 신형 정보통제로 변형돼 심각한 커뮤니케이션의 단절로 종결될 공산이 크다.
브리핑룸과는 별도로 기사 송고를 위한 부스나 공간의 유료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별도의 부스가 필요한 언론사는 돈을 내고 사용하는 방식이다. 언론사나 기자단의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는 한 현실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끝으로 브리핑룸제가 확립된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공영방송사에는 정부청사와 국회같은 주요 취재장소에 기사 송고와 생방송이 가능한 별도의 부스를 할애하고 있으며 타 언론사도 공영방송의 특성상 불가피한 것으로 양해하고 있었다는 필자의 목격담을 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