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이 지난달 26일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직장암으로 시달리던 김씨는 지난해 11월 12일 치료를 위해 방북 허가를 신청했습니다. 북한의 한방 치료를 희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부는 방북 신청을 불허했고, 결국 원하는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떴습니다.
그런데 김씨 사망 관련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한 마디로 사갈시(蛇蝎視)나 '모르쇠'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역부족'에 대한 번민과 '대세'를 핑계삼은 자위 정도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요. 이런 태도는 모름지기 범민련이 지난 97년(대선 직전) 이적단체로 규정됐고 김씨가 이 단체 상임부의장이며 범민련 관련 사건으로 무려 네 차례나 투옥됐다는 사실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봅니다.
지면이나 시간의 한계와 함께 '사회에 대한 기여도'나 '사회적 영향력'을 이유로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가 언론에 거명될 만큼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사회발전에 기여하지 못해 부족한 지면과 시간의 한계상 보도할 수 없었노라고.
그밖에 다른 이유를 찾아 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 굴릴 것 없이 적대감에서 싹튼 '편가름'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주영씨 방북을 취재하느라 판문점 입구에서, 자유의집 지붕에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하는 충성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민간(또는 재야)과 제도권의 통일운동(또는 사업)을 '편가름'하는 예는 많아요. '(김정일)장군 예의바름'에 대한 정 회장의 열렬한 칭찬은 괜찮고 민주노총 방북축구단의 의례적인 언동에는 '이적행위 가능성'을 시비하는 것 등. '우리편'은 괜찮지만 '사상이 불온하거나 확실치 않은' '너'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법!' '친북!' 등의 표피적 현상으로 '민간통일운동'을 재단하지 맙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망막에 덧씌워진 색안경을 벗고 보면 자연인 김양무는 그저 '평화(친북)통일운동'에 일생을 바쳐온 사람일 뿐입니다.
'친북'을 시비한다면 친하지 않고 화해는 어떻게 하고 협력은 또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당근과 채찍론'이나 '화해와 안보 병행론' 등 '한반도 현실'을 주장하며 김씨의 순진무구함을 비난한다면 통일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권하겠습니다.
간단하게 군과 정부, 민간단체들의 역할분담을 생각해 보십시오. 군이나 안보당국 또는 이에 준하는 여러 '관계당국'이 북한과의 '화해'를 생각할 수 없듯이(군의 경우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있는 한 북한과의 화해는 생각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지요) 평화통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또는 단체에게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요 횡포입니다. 남한이 무력점령이나 흡수통일이 아닌 남북화해와 평화공존을 지향한다면 '적'개념이 차지하는 시공(時空)은 서서히 줄어들고 '화해와 협력' 개념이 서서히 커져야 합니다. 이것이 곧 군축이지요. 적 개념과 화해 개념의 역할분담에서 언론은 마땅히 화해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물론 OO사단이나 XX여단의 기관지라면 예외겠지요) 혹 김씨와 범민련이 북한의 지령에 의해 움직여 북한 하자는 대로 구호를 따라 외는 북한 대남적화 전략기구의 하수인 아니냐고 묻는다면 항상 북한과 다르게 말하고 다른 주장을 해야 하느냐고 묻겠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동인 김성일과 서인 황윤길 등 두 사람처럼 말입니다. 평화통일론자들을 빨갱이라 매도하고 이들을 짓밟으며 체제안정을 부르짖는 행위는 지난 세기로 족하지요. 언론이 나서야 할 일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