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기] 매향리 폭탄 투하 사건
시골마을 매향리의 ´또 다른 전쟁´, 사건 발생 한달 지나도록 속수무책...책임감.회의 느낄 뿐
경태영 | 입력
2000.11.16 14:32:24
경태영 경향신문 전국부 기자
한국내 유일한 미공군 사격장인 경기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쿠니사격장.
주한 미공군뿐 아니라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공군기까지 날아와 폭탄을 쏟아 붓고 있다.
지난 50여 년 동안 이곳 주민들은 주말을 빼고 하루도 빠짐없이 쏟아진 총탄과 자욱한 포연 속에서 말 그대로 생명을 위협받는 공포와 불안의 나날을 보내왔다.
한동안 마을 밖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매향리 사태가 다시 불거진 것은 지난 5월 8일 미공군 A-10기가 227㎏짜리 실전용 MK-82 폭탄 6발을 농섬 인근에 떨어뜨린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다.
그동안 매향리에는 수 차례에 걸쳐 미공군기의 오폭과 폭탄 파편 등으로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고 그 때마다 주민들은 피해와 대책을 호소했지만 정부와 미공군은 철저한 외면으로 일관해 묻혀져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평등한 한·미 행정협정(SOFA) 개정 논의와 맞물리면서 전 국민의 관심사로 부각됐다. 또 미 전투기 조종사 출신의 브라이언 윌슨 씨가 우라늄탄 사용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 파문은 확산됐다.
이번에도 별일 아닌 일로 생각했던 국방부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고 지난 51년 사격장 설치 이후 처음으로 미군까지 나서 10일 동안 합동조사를 벌여 주민들은 때이른 기대와 희망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합동조사단은 지난 1일 “5·8 폭탄 투하사건으로 인한 객관적 피해사실이 없다”고 발표해 주민들을 분노케 했고 사격 중지 대신 사격장 폐쇄를 외치게 만들었다.
이어 하룻만인 2일에는 할 일을 다했다는 듯 19일만에 폭격을 재개해 한동안 포성이 멎고 평화를 되찾았던 매향리 주민들을 다시 공포에 떨게 했다.
지난 6일 매향리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당초 매향리 주민들과 SOFA 개정 국민운동, 환경운동연합, 민노총 등 시민·노동단체와 대학생 등 3000여 명은 ‘매향리 사격장 폐쇄를 위한 평화 인간띠 잇기’ 행사를 갖고 평화를 기원하는 매화나무를 심으려 했다. 그러나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어야 할 곳에는 대신 사격장 철조망이 군데군데 끊어졌고 전선(戰線)을 방불케 하는 대치와 격렬한 몸싸움 속에 매향리 평화는 아직도 요원함을 실감케 했다.
지난 5월8일 사건 발생후 회사의 취재 지시로 이 사건을 전담해온 나는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매향리 사태가 아무런 진전없이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책임감과 함께 회의마저든다.
주민들이 그렇게 피해를 호소하며 절규하고, 시민단체와 대학생들이 사격장 철조망을 부수는 시위를 벌이고, 언론이 그렇게 떠들어 댔어도 매향리 사태는 겉돌고 있다.
현장에서 지켜본 매향리 주민들의 꿈은 소박하기만 했다. 이들은 많은 피해보상이나 이주대책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사격장이 폐쇄되거나 이전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자 고향인 매화 향기 그윽한 옛 고온리를 되찾고 싶을 뿐이다. 또 아이들에게 귀를 찢는 폭격음 대신 바다 소리 자장가를 들려주고 싶을 뿐이다.
한쪽에서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있지만 다른 한쪽 매향리 주민들은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뒤 15일부터 재개될 폭격의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