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이 아니라 '공적 기준'
2022년 귀가하던 여성을 따라가다 피해자의 머리를 돌려차기로 가격한 후 성폭력을 저지르고 살해하려 한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의 폭행 장면이 담긴 CCTV 화면은 사건 후 몇 년 동안 관련 보도에 계속 등장했다. 잔혹한 범행 장면이 수년 뒤까지 반복적으로 노출될 필요가 있을까. 이듬해 서울의 한 등산로에서 여성을 무차별 폭행해 살해한 최윤종은 부산 돌려차기 사건 보도를 보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범행 수법을 필요 이상으로 상세히 전하는 보도는 2차 피해로 이어질 뿐 아니라 때로는 이처럼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수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블레이드 러너'
1968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목성 탐사선의 인공지능 HAL 9000은 승무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탐사 목적을 비밀로 하라는 명령과 정직하게 정보를 전달하라는 명령이 충돌한 결과였다. 오작동을 의심한 승무원들이 자신을 정지시키려 하자 HAL은 그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1982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레플리컨트 로이가 자신을 은퇴시키러 온 형사 데커드가 난간에 매달려 발버둥 치자 그를 살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은퇴하기 직전에 말이다.나는 너희 인간들이 믿
척박한 땅에서 핀 꽃, 이제는 토양을 바꿀 때
우리 유소년 스포츠를 보면 가끔 묘한 장면을 마주한다. 환경은 척박한데, 선수들은 계속 꽃을 피운다. 국제축구연맹(FIFA) U-20 여자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은 강호 프랑스와 비기고 마지막 경기에서 에콰도르를 3대 2로 꺾으며 두 대회 연속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대만에서는 18세 이하 야구대표팀이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일본을 2대 0으로 꺾고 8년만에 정상을 탈환하면서 일본을 제치고 대회 최다 우승국(6회)까지 됐다. 박수받아 마땅한 성과지만, 냉정히 보면 이는 시스템의 결실이라기보다 개인 기량이 척박한 환경을 뚫고
현실로 찾아온 '손실과 피해'의 시간
2022년 연말, 이집트 샤름엘셰이크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습니다. 그간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세계 각국의 노력을 강조해 왔던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였는데, 27번째 총회에선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이 주요 의제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백만톤 줄이겠다, 석탄화력발전을 20□□년까지 퇴출시키겠다 미래의 목표를 주로 논의하던 자리에서 책임을 다루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녹색전환의 기술 선도 국가이기도 한 선진국들은 미래 논의에서 자국의 기술적 우위와 미래 의제 주도권을 쥘 수 있지만, 반대로 과거를 돌아봄
코스피 급등이 남긴 상흔들
코스피 시장으로 머니 무브(자금 이동)가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려스러웠던 건 보험 해약이 눈에 띄게 늘어난 점이었다. 국내 3대 생명보험회사의 올해 상반기 해약환급금은 13조원에 육박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1% 폭증한 규모다. 보험을 중도에 해약하면 대부분 납입한 보험료보다 적은 돈을 돌려받는다. 손해를 감수하고 보험을 깬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코스피가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에 미래를 위해 쌓아둔 돈까지 증시에 앞당겨 쓴 셈이다.청년들의 빚투(빚내서 투자)는 더욱 눈에 밟혔다. 6월 말 기준 2030대 주식 신용
호프는 왜 문제적 영화가 되었나?
지난 몇 년간 영화 취재를 하면서 포스트 박찬욱과 봉준호가 누구냐?는 질문을 간혹 받았다. 나는 그때마다 나홍진을 언급했다. 그는 장르영화를 만들면서도 자신만의 인장을 뚜렷하게 새길 줄 아는 작가다. 데뷔작 추격자(2008) 때부터 발군의 연출력을 선보였다. 이후 황해(2010)와 곡성(2016)을 거치면서 탄탄한 팬층도 생겼다. 하지만 이번 HOPE(호프)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인데, 감독의 명성에 비해 다소 아쉽다는 얘기다. 초반 한 시간가량은 정말 놀라웠다. 문제는 중후반부다. 그때부터 편집의 리듬이 어긋나
AI가 불러온 신냉전시대
인공지능(AI) 업계에서 자주 참고하는 것이 미국의 오픈라우터 집계다. 오픈라우터는 각 AI의 성능을 비교하고 사용량 등을 측정해 주간 단위로 순위를 발표한다.최근 오픈라우터 발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중국 AI의 독주다. 8월 첫째 주 연결 프로그램(API) 호출 기준으로 상위 5개 AI가 모두 중국산이다. 1위에 오른 딥시크 V4 플래시를 비롯해 샤오미의 미모 V2.5, 텐센트의 훈위안3, 딥시크 V4 프로, 지푸의 GLM 5.2 등 중국산 AI가 벌써 3개월째 상위권을 휩쓸고 있다.주목할 것은 API 호출 기준이다. API
제 발로 불볕더위에 뛰어드는 사람들
덥다. 세상이 모두 불타오르듯이 덥다. 부글부글 끓던 더위가 어느 밤을 기점으로 치솟아버렸다. 경남 양산은 기상관측 이래 최고기온을 기록했다고 한다. 전례가 없는 일투성이라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매년 이즈음이면 노동단체들은 바쁘다. 정부를 상대로 폭염 대비 정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린다. 아파트 건설 현장이나 다리를 짓는 건설기능직은 이 중에서도 좋은 장면을 내놓아 한동안 관심이었다.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건설노조는 매년 건설 현장의 타죽을 것 같은 더위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했는데 자체 조사한 건설 현장 온도를 기록해 발표하고
출산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이유
저출산이라는 용어를 저출생이라고 바꿔 부르자는 흐름이 있다. 인구 감소의 원인과 책임을 출산하지 않는 여성에만 떠넘기지 말자는 취지다. 저출산 대신 저출생이라는 대안어를 쓰자는 주장은 2016년 행정자치부가 지역별 가임기 여성 수를 지도에 분홍색으로 색칠한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만들었다가 거센 반발을 산 사건을 계기로 처음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 주장은 사회적 공감을 얻으며 일부 정책 용어와 공식 용어가 저출산에서 저출생으로 변경되기도 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저출생이라는 용어가 인구 감소 현상을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
북중미 월드컵 징비록
5월18일 축구대표팀이 북중미 월드컵 첫 행선지인 미국 솔트레이크시티로 가는 길에 동행한 취재진은 우리밖에 없었다. 보통 사전훈련캠프부터 취재를 하는 게 월드컵 출장의 관례지만, 치솟은 환율로 출장 비용이 급등했고, 늘어난 참가국만큼 조별리그 기간이 늘어나 출장 기간이 길다는 점, 주요 해외파 선수들이 늦게 합류한다는 점에 언론사들의 고민이 깊었다.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된 홍명보 전 감독과 대표팀 관계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불편한 마음이 자리했다. 이번 대표팀은 전보다 언론도, 팬들도 외면한 팀이라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