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안종필은 기자협회보와 인터뷰 이튿날인 2월14일 퇴원했다. 현대의학으로는 더 이상 치료가 어려웠다. 인터뷰에서 밝힌 그대로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기적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안종필은 퇴원하며 이장규 박사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화분을 선사했다. 여러 가지로 편리를 봐주어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봄이 되면 새싹이 돋고 꽃이 필 텐데, 내 건강도 이 새싹처럼 회생될 테니 그때 함께 그 꽃을 보면서 소주나 한잔 나누자”고 말했다.
안종필은 집에서 요양하며 투병을 계속했다. 치료랄게 없었다. 기도하는 게 전부였다. 그는 건강이 회복되어 일어나면 교회 종지기를 하겠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남보다 1시간 먼저 교회에 나가 교회 청소도 하고 내 손으로 종도 치고 싶다고 여동생 안애숙에게 여러 차례 얘기했다. 생명의 불이 꺼져가고 있음을 예감한 친지들이 잇따라 찾아왔다. 외삼촌이 부산에서 올라왔을 때 안종필은 부산에 데려가달라고 했다. “해운대에 가고 싶어요. 푸른 바다가 보고 싶어요. 외삼촌, 나 부산에 데려가 주세요….” 외삼촌은 눈물을 애써 참으며 조금 좋아지면 꼭 데려가겠다고 했다.
굼벵이 등 암에 좋다는 별별 약을 보내왔던 안채열이 큰아들을 보러왔다. 배에 복수가 차 기운이 없던 큰아들을 자신의 무릎에 베고 눕혔다. 안쓰러워하는 아버지의 표정에 안종필은 울면서 말했다. “아버지,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부자지간은 소원해졌다. 먼 길을 달려 구치소 면회실을 찾은 아버지를 냉랭하게 대했던 그였다. 죽음을 앞둔 그는 아버지에 대한 묵은 원망을 내려놓고 화해했다.
2월27일 저녁, 안종필은 아내와 여동생, 아들을 안방으로 불렀다. 거뭇거뭇해진 얼굴로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애숙이 큰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입학식 때 좋은 옷을 사주라며 아내에게 당부했다. 아들의 손을 잡고선 네가 집안의 장손이니 사촌들하고 잘 지내라고 말했다. 안애숙에게 오늘 자고 가면 안 되냐고 했다. 아내를 바라보며 내가 빨리 일어나서 도움의 손길을 베풀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겠다고 했다.
“우리들이 감옥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도움과 격려가 있었는지 모른다. 이분들에게 아직 인사도 못 드렸으니…. 윤보선 선생, 김수환 추기경, 해직교수들, 신부님들, 목사님들, 구속자 가족들, 자유실천문인들, 민청협의 젊은 친구들…. 모두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2월28일 새벽 3시쯤 오빠가 자꾸 너를 찾는다는 올케언니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안애숙은 택시를 타고 하월곡동으로 향했다. 안애숙이 도착했을 때 가족들은 안종필을 가운데 눕히고 둥그렇게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안애숙은 눈물을 글썽이며 “오빠!”하고 불렀다. 안종필은 “이제 오나, 니 우리 집에서 안 잤나? 어 그래 니 참 너그 집에 갔제…”라고 말하며 의식을 놓았다. 이해동 목사 부부가 달려왔다. 혼수상태에 빠진 안종필은 그날 오후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서울대병원 고창순 부원장 등 의료진의 노력에도 안종필은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안종필은 1980년 2월29일 저녁 7시40분 가족들과 동아투위 동료 50여명이 오열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향년 43세였다. 서울대병원에서 동아투위장(葬)으로 치러진 안종필의 장례식은 통곡의 바다였다. 재야인사, 정치인, 성직자, 대학교수, 변호사, 언론인, 문인, 학생,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등 1000여명이 조문했다.
3월4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영결식이 치러졌다. 안종필이 1977년부터 다니던 한빛교회의 이해동 목사는 영결사에서 “그의 죽음은 분명 자연사가 아니라 그를 감옥에 처넣은 악의 세력에 의한 타살이옵니다. 그의 죽음이 순교였기에 그의 뜻이 우리 속에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느님이여 축복해 주소서!”하고 기원했다. 송건호는 조사에서 “안형! 이게 꿈이 아닙니까. 형이 세상을 떠나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언제나 미소 지으며 말하던 형의 얼굴, ‘안형~’하고 부르면 웃으며 돌아볼 것 같은 형의 얼굴을 이제 영 대할 길 없게 됐으니 아무래도 꿈만 같습니다. 왜 형만 먼저 떠나갔습니까? 5년간 같이 고생한 숱한 동료들을 남겨두고 왜 형만 혼자 떠나갔습니까?”라고 애도했다.
수백명의 흐느낌 속에 영결식이 끝나고 장지로 가는 차량들이 서울대병원에서 안국동 로터리 부근까지 긴 행렬을 이루었다. 영구 행렬은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러 동아일보사 앞에 멈췄다. 사옥 정문 앞은 신문방송차와 취재용 승용차로 바리케이드가 쳐 있었다. 건물 창밖으로 옛 동료 얼굴 하나 비치지 않았다.
조객들은 차 안에서 일어나 잠시 묵념을 올렸다. 동아일보에 복직해 기자 생활을 더 해보고 싶다는 안종필의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종필은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동아일보 편집국을 죽어서도 밟지 못했다. 안종필은 원자력병원 병상에서 후배 권근술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요즘 나는 우리를 쫓아낸 김상만 회장이나 이동욱 사장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네. 그들 역시 인간인 이상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고민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우리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들의 명예가 아니라 동아일보사와 그들 자신의 명예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그런 마음의 안종필을 동아일보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종필은 일산 기독교공원묘지에 안장됐다. 동아투위는 언론자유 운동에 헌신한 안종필을 기리기 위해 1987년 안종필자유언론상을 제정했다. 안종필의 묘는 2016년 10월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으로 옮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2년 안종필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