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8월31일 오후 2시 이상회 전 세계일보 사장에 대한 출국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씨는 통일재단 산하 미국 브리지포트대학교 부총장으로 취임하기 위해 그날 오후 7시30분 KE051편으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그는 무슨 이유로 출국 당일에 발이 묶인 것일까.
모든 것은 그가 세계일보 사장(1997년 4월~1999년 8월)을 하면서 벌어졌다. 이씨가 세계일보 사장에 선임된 것은 1997년 4월22일. 13대 국회의원(민정당 전국구)을 지낸 그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언론학자였다. 이 신임 사장은 “권력의 외압과 간섭에서 벗어나 국민과 독자 편에서 권력을 감시하는 파수꾼이 되기를 약속한다”는 요지의 경영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그 약속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사장은 취임 첫날부터 편집회의에 참석해 취재 지시를 하는 등 신문 제작에 일일이 간섭했고, 김영호 편집국장은 “사장의 편집권 침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적잖은 기자들이 이에 동조하자 이 사장은 6월3일 김 국장을 돌연 경질했다.
4월1일 취임한 김 국장은 한국 언론 사상 최단명(62일) 편집국장 기록을 남기고 논설위원실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편집국장 경질에 세계일보 기자들은 ‘편집국 기자일동’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며 반발했다.
반발의 대가는 인사 보복으로 이어졌다. 편집국장과 편집담당 부국장, 일부 부장들을 외부에서 영입한 이 사장은 7월 초 기자 21명을 영업지원팀과 문화사업국 등 비편집국과 국장석으로 발령 냈다. 이 사장의 편집권 침해에 반발한 기자들이 표적이었다. 한국기자협회 세계일보 전·현직 지회장 등을 편집국 밖으로 내모는 현실은 ‘나에게 줄 서라’는 사장의 메시지였다.
기자 21명 비편집국 발령에 노조 결성
기자들을 비편집국으로 전보 발령한 보복 인사는 전격적인 노조 결성으로 이어졌다. 세계일보 기자 30여명은 7월9일 발기인대회를 갖고 서울 서부지방노동사무소에 노조 설립 신청서를 접수한 뒤 편집국 대회의실에서 출범식을 가졌다. 1991년 이후 휴면기에 들어간 노조를 재건한 것이다. 노조위원장은 전 기자협회 지회장인 조대기 기자가 맡았다.
조대기 노조위원장은 당시 기자협회보와 인터뷰에서 “노조 결성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부분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인사 불이익에 대한 반발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몇 년간 ‘나의 일이 아니다’라는 식의 무관심이 기자 21명의 기자직 박탈이라는 오늘의 상황을 있게 했다. 편집국 인원의 3분의 1을 감축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이번 인사를 피해 간 사람들도 언제 화살을 맞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노조가 인사·경영 파행에 책임을 지고 사장 퇴진과 부당·파행인사 철회를 요구하자 세계일보는 7월25일 회사 명예 실추와 사내 질서 문란 등을 이유로 노조 간부 3명(조대기 노조위원장, 조민성 사무국장, 조정진 공정보도위원장 겸 노보 편집장)을 파면했다. 이들은 “전직 조치가 부당한 인사이고 주어진 업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어떠한 지시조차 없었던 만큼 파면 조치는 무효”라며 서울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에 구제신청을 했다.
1997년 11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경영난이 가중하자 임금삭감과 인력감축 등 구조조정 바람이 언론사에 휘몰아쳤다. 경향신문 시경캡 연봉이 4000만원대에서 1600만원대로 60% 삭감된 것은 타격이 아니었다. 모든 언론사에서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떠났다. 한국기자협회 회원이 IMF 이후 872명이 줄어든 것은 당시 기자들 대량 해고 실상을 보여준다. 1998년 10월 기준으로 기자협회 회원은 6000명으로 1년 전에 비해 12.7%(872명) 감소했다. 서울 회원은 10.8%(364명), 지역 회원은 14.5%(508명) 줄었다.
감원 등 구조조정 과정에서 언론사마다 진통은 있었다. 그러나 세계일보만큼 격렬하진 않았다. 세계일보는 1998년 2월 세계일보 차장급 이상 106명에게 일괄 사표를 강요했다. 세계일보 고위간부회의는 회사 경영이 어려우니 사장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차장급 이상은 자진 사표를 제출해 사장의 재신임을 묻는 것이 좋겠다고 결의했고 각 실·국장들이 이를 전달했다. 같은 달 28일 계약기간이 만료된 계약직 사원 18명에 대해선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기자 53명 포함 60명 해고 통보
세계일보는 3월3일 기자 53명 등 사원 60명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회사가 작성하라고 준 사직서에는 ‘일신상의 사유로 그만둔다’는 문구만 있고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었다. 조대기 노조위원장은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 체불임금 등을 이유로 이 사장 등 경영진을 노동부와 검찰, 경찰에 고소했다.
대규모 정리해고에 회사가 어수선했다. 기자 45명을 포함해 직원 52명은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냈으나 기자 8명이 사직서 제출을 거부했다. 세계일보는 이들의 책상을 편집국에서 들어내고 무보직 대기발령을 내렸다. 어수선한 회사에 불을 끼얹은 일이 발생했다. 공무국 윤전부 윤모 과장이 3월26일 새벽 근무를 마치고 작업일지를 작성하던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졌다. 동료의 뇌사 소식을 접한 공무국 사원 36명은 작업환경 개선과 이상회 사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세계일보 노조는 다음 날 쟁의발생 신고를 냈다.
세계일보 노조는 4월6~7일 양일간 파업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재적인원 150명 중 142명(투표율 94.7%)이 투표에 참여해 116명(찬성률 82.3%)이 파업에 찬성했다. 노조는 4월9일 4시간가량 진행된 회사와의 최종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사옥 앞 주차장에 천막 3동을 치고 △부당해고자의 조건 없는 복직 △노조 인정 △회사 측의 성실한 단체협상 등을 촉구하며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다.
세계일보는 경비용역회사 2곳과 계약을 맺고 용역경비원들을 고용해 파업 집회를 감시하며 노조원들의 사내 출입을 통제했다. 또 ‘세계특보’ 유인물을 발간해 “파업은 공멸의 무덤을 파는 행위”라며 “최근 사태에서 사원들 간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작금의 사태는 회사 외부와 연결고리를 가진 소수집단이 이를 악이용하려는 저의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장외투쟁에 나섰다. 서울시청 앞, 여의도 새정치국민회의 당사, 서초동 법원·검찰청 앞, 서울역 앞과 압구정동 이상회 사장 집 앞 등지에서 ‘노보 특보’를 배포하면서 사장 퇴진 등을 요구했다. 4월23일에는 통일교재단에서 사장 퇴진 촉구 결의대회를 열며 투쟁의 강도를 높였다.
용역경비원 10여명 파업농성 천막 난입
4월28일 새벽 4시30분 검정 점퍼를 입은 100여명이 파업농성 천막을 덮쳤다. 용역경비원들은 노조원들을 강제로 회사 밖으로 내쫓고 노조가 증거물로 보관해 온 비디오테이프 등 각종 자료를 모두 빼앗았다. 농성 천막 안에는 105명의 파업 참가자 중 여성노조원 등을 제외한 50여명이 잠들어 있었다. 20여명은 천막 인근 승용차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강제 해산 과정에서 노조원 10여명이 다치고 노조원 소유의 승용차 10여대와 컴퓨터 등 노조 집기가 부서졌다. 편집국 기자 32명은 이 사태와 관련해 이날부터 기사 송고를 전면 거부했다. 노동부 서부지방노동사무소는 세계일보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에 들어갔다. 노조는 이날 밤 농성 천막 3동을 다시 설치했다.
세계일보는 단체교섭을 거부하며 노조 무시 전략으로 나왔다. 이런 가운데 서울지방노동위는 전인희 기자 등 8명을 원직 복직시키고 대기발령 기간 중 미지급된 임금을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파업 초기 소수에 불과했던 편집국 기자들은 뒤늦은 동참을 후회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파업에 참여했다.
조대기 위원장 등 5명이 5월25일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자 사측이 단체교섭 재개를 요청했다. 노사 양측은 5월28일부터 나흘간 협상에 나서 6월2일 △노조 사무실 설치 △노조 전임자 인정 △노사가 제기한 민·형사상 고소·고발 취하 △윤 과장 사건으로 작업 거부를 벌인 공무국 조합원 사면 등 핵심 쟁점 타협안에 합의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6월3일 이상회 사장이 협상안을 뒤집는 수정안을 내면서 타협이 결렬됐다. 이 사장이 부당노동혐의로 검찰 출두 명령을 받은 가운데 노사 대표는 6월12일 다시 만나 △단체교섭 재개 △노조 임시사무실 제공 △조합원 일부 업무 복귀 등에 합의했다. 노조는 농성천막 3동을 자진 철거했다. 이 협상안에 대한 일부 노조원들의 반발과 해당 부서장의 조합원 업무 복귀 거부 등이 맞물려 최종 타결을 보지 못했다.
세계일보는 6월15일 1면과 25면에 ‘세계일보 사태의 전말을 알립니다’는 알림을 실어 “정론지 세계일보가 심각한 음해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정통보수 논조를 못마땅하게 보는 세력이 공세를 펴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노조는 닷새 뒤인 6월20일 ‘세계 사태의 진상은 이렇다’는 성명서로 반박했다. 한국기자협회는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론노련)과 공동으로 이상회 사장 퇴진 서명을 받았는데, 전국 34개 언론사 2010명이 서명에 이름을 올렸다.
세계일보 노조는 6월25일 총회를 열어 파업 중단 여부를 투표에 부쳤다. 찬성 59명, 반대 10명으로 파업 잠정 중단안이 통과됐다. 노조는 “판매와 광고가 급감하는 등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경영 여건을 감안해 파업 잠정 중단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81일간의 파업이었다. 조대기 위원장은 “파업 중단에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했다.
파업은 끝났지만, 쌍방 간에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졌다. 세계일보는 ‘업무방해’, ‘명예훼손’ 등 20여건의 소송을 노조에 제기했고, 노조는 ‘부당 노동행위’, ‘파업장 폭력 해산’ 등을 문제 삼아 이 사장 등에 소송을 냈다.
이 사장은 1999년 8월31일 퇴임했다. 그는 퇴임 당일 미국행이 출국금지로 막히자 세계일보 인사부장을 통해 조대기 전 위원장, 조민성 전 사무국장, 조정진 기자협회 지회장 등 3명을 복직시키고 해고 이후 체임을 지급하겠다며 각종 민·형사 소송 취하를 제안했다. 이들은 이 요청을 거부했다.
이 전 사장은 그해 11월 부당노동행위와 임금체불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후 2000년 3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조대기 전 위원장 등 3명은 서울지노위와 중노위에서 원직 복직 판정을 받은 데 이어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의 부당해고 철회 소송에서도 모두 승소해 2000년 6월 복직했다.
<참고 자료>
▲기자협회보, <세계일보 노조 6년 만에 재출범>, 1997년 7월12일
▲기자협회보, <세계일보 직장폐쇄 위협>, 1998년 5월4일
▲세계일보, <세계일보 20년사>, 세계일보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