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정명훈이 라 스칼라 극장의 차기 상임지휘자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클래식 애호가는 아니지만 익숙한 이름의 극장이었는데, 247년 역사상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상임지휘자가 되었다는 보도에 뿌듯함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런데 정작 진짜 부러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막연하게 로마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라 스칼라 극장이 사실은 밀라노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연달아 비슷한 사례가 떠올랐다. 미디어 역사에서 24시간 생방송 뉴스 보도의 세계를 열어젖힌 CNN의 본사는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LA)에 있지 않다. 워싱턴 D.C.도 아니다. 이름도 생소한 조지아주의 애틀랜타에 있다. 물론 지금은 오랜 시간 인수합병을 거치며 애틀랜타 본사의 지위가 명목상에 불과한 것이 되었지만, 땅이 큰 미국은 굴지의 세계적인 기업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는 경우가 흔하다. 스파이 액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CIA 본사만 하더라도 워싱턴 D.C.가 아니라 버지니아주의 랭글리에 있다.
선진국이 부러운 때는 이런 경우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도시가 한 군데가 아니라는 것. 국토 크기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도시국가가 아닌 한, 역사와 국력이 강한 나라의 대부분은 여러 도시가 나름의 역할과 영향력을 갖고 대표 도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우리나라처럼 정치, 사회, 경제, 행정, 문화, 교육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가 한 도시에만 집중된 나라는 흔하지 않다.
그래서 차기 정부에 개인적으로 가장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국토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에 확고한 진정성을 가진 후보자가 이끄는 정권이 들어서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정책 측면에서도 공약으로만 나열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일관된 실행력을 뒷받침함으로써 생기를 잃어가는 지역에 정확한 심폐 소생을 집행할 수 있는 후보자가 선출되기를 바란다. 같은 맥락에서 지역 미디어에 대해서도 과감하고 현실적인 정책이 추진되기를 희망한다.
보통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미디어 정책과 관련해 주된 관심사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문제다. 방송통신위원(KBS 사장 선임권 갖는 이사 추천)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MBC 사장 선임)를 결정하는 문제로, 여와 야의 추천 몫을 몇 명으로 할 것인지, 대통령 추천 몫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어쩌면 차기 정부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반복되며 지역방송 문제는 뒷전으로 밀릴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차기 정부는 국토 균형발전에 대한 진지함 속에서 지역 미디어 문제에 접근하는 정권이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최근 학계와 전문가, 현업 종사자가 공동으로 마련하는 정책 세미나가 자주 열린다.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안타까운 사실 중 하나는 지역방송의 위기를 논하는 담론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역방송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하고 활성화를 강구하는 대책도, 전략적 방안도 처음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멀리는 2010년대부터 유사한 논의가 반복돼 왔다. 논의는 거버넌스, 재원, 회사의 자구책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그 중 핵심 하나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단독기금의 확보다. 미디어의 지속가능성을 논하는 담론이 돈 얘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서글픈 일이겠지만, 역으로 재원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활성화방안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역방송 재정 지원 구조는 방송통신발전기금(방발기금)의 일부를 할당받아 지원해 주는 형태다. 이 중 프로그램 지원사업은 지역방송지원특별법이 제정된 2014년 20억원으로 시작해 매년 소폭 상승하다 2022년부터는 39억원가량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사업에는 MBC와 SBS 지역계열사를 비롯해 중소케이블방송 등이 참여할 수 있는데 보통 40개 안팎의 방송사업자가 지원한다. 따라서 단순하게 계산하면 1개 지역방송 당 1억원가량을 지원해주는 셈이다. 문제는 지역방송의 공익성과 공적 책무를 이행하는 데 프로그램 제작지원비가 절실하고, 이 정도의 액수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지역방송은 방발기금의 극히 일부를 분배받을 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설령 방통위가 의지를 갖고 예산을 책정하더라도 기획재정부의 문턱을 넘지 못해 좌초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단독기금을 마련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의지를 갖고 해결해 줄 후보자가 당선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