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gen, was ist.’ 7월9일(현지 시각) 독일 함부르크 에리쿠스슈피체의 슈피겔 사옥 1층 로비에서 올레 라이스만 AI 책임자를 기다리다 벽면에 붙은 독일어 문장에 눈이 갔다. 독일어로 ‘자겐, 바스 이스트’로 읽는데, 우리말로 옮기면 ‘있는 그대로 말하라’다. 루돌프 아우크슈타인 슈피겔 설립자가 남긴 이 짧은 문장은 슈피겔의 DNA를 상징한다.
1947년 1월4일 주간지로 창간한 슈피겔은 수십 년에 걸쳐 사업 영역을 넓히며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70년대 경제지 ‘매니저마가진’을 발행하고, 80년대 ‘슈피겔 TV’로 방송 사업에 진출했으며, 90년대에는 온라인 뉴스 서비스 ‘슈피겔 온라인’을 설립했고, 2010년대 들어 온라인 유료 구독 모델을 도입하는 등 디지털 콘텐츠 서비스를 확장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슈피겔은 어떤 상황을 마주하고 있을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슈피겔 웹사이트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챗GPT에 질문하고 바로 답변을 얻게 되면서 웹사이트 유입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용자들이 언론사 웹사이트에 도달해야 수입이 창출되거나 구독이 이뤄지는데, 그런 일이 훨씬 줄어들게 된 거죠.” 슈피겔 그룹 AI를 총괄하는 올레 라이스만의 말이다.
트래픽과 광고에 의존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AI 등장으로 살아남기 힘들어졌다. 슈피겔은 ‘디지털 퍼스트’와 ‘구독자 확보’라는 목표 아래 AI 전략을 취하고 있다. 핵심은 AI는 보조 도구라는 것이다. 슈피겔은 △번역 및 음성의 텍스트 변환 △맞춤법, 문법, 표기법 △글의 개선 △팩트 체크 △아카이브 또는 인터넷 자료 조사 △방대한 데이터 분석 △오디오 및 비디오 편집에 AI를 보조 도구로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슈피겔은 AI가 기사를 작성하거나 재작성하는 걸 금지한다. 라이스만은 “슈피겔은 독자와 신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며 “AI에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슈피겔 수익원은 판매와 구독이 77%, 광고가 23%를 차지한다.
나치당(NSDAP) DB 구축에 AI 활용
슈피겔은 5월 수백만 장의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 당원 카드 파일을 AI로 분석해 독자들이 가족사를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AI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라이스만은 “AI가 없었다면 1200만 장의 나치당 당원 카드 이미지를 분석하는데 수백 명의 사람이 필요했거나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했다.
나치당 당원 데이터베이스는 편집국, IT부, 팩트체킹부 등 여러 부서가 협력한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수스미타 아르프 기자는 “우리에게 혁신적이고 새로운 분야였다”면서 “예산이나 IT 개발자도 부족하고, AI 전담 인력이 많은 것도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실패하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아르프는 팩트체킹 부서 AI 프로젝트 팀에서 부국장으로 일한다.
슈피겔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디지털 형태로 공개한 1200만 장의 나치당 당원 카드를 내려받아 AI를 이용해 누구나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당원 카드에 적힌 글씨는 바랬고, 일부는 텍스트가 희미했다. 많은 카드가 옛 독일어 필기체로 작성되어 있었으며 크기는 서로 달랐고, 이름이나 주소를 적어 넣은 방식도 제각각이었다. 슈피겔은 AI가 오래된 카드를 읽을 때 발생하는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아르프는 “AI가 카드를 판독할 때 오류를 최대한 줄이도록 프롬프트를 작성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다. 자주 실패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슈피겔은 나치당 당원 검색 시스템에 스마트 검색 기능(smart search)을 넣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에 관한 인적 사항을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검색 방식이었다. 이름뿐만 아니라 직업, 생년월일, 거주지, 출생지를 이용해 검색할 수 있고, 철자가 정확하지 않아도 검색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슈피겔보다 먼저 구축한 독일 언론사 ‘디 차이트’의 검색 시스템과 차별화하는 지점이었다.
“이용자들은 조상의 정확한 이름, 생년월일, 출생지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스마트 검색으로 조상의 당원 카드를 찾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여러 개의 이름 가운데 하나만 입력했거나, Johannes 대신 Hans 또는 Gertrud 대신 Trude를 입력한 경우에도 검색이 가능하죠.” 아르프는 “정확한 출생 연도를 모르더라도 출생일만 입력해도 되고, 다른 데이터베이스에서는 불가능한 직업을 기준으로도 검색할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검색 서비스는 유료 구독자만 이용할 수 있는 ‘슈피겔 플러스’ 전용인데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르프는 “슈피겔 역사상 가장 많은 신규 구독자를 유치한 프로젝트가 됐다”고 했다. 라이스만은 “나중에 나치 친위대(SS) 관련 기록을 추가해 검색 시스템을 업데이트했다”며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반응이 좋다”고 했다. 슈피겔 온라인에는 하루 120개 안팎의 기사가 올라온다. 지난해 슈피겔 디지털 유료 구독자는 약 25만명이다.
“AI 없었다면 영상 보는데 1주 걸렸을 것”
슈피겔은 1월 틱톡(TikTok)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인플루언서들의 급진화 과정을 추적 보도했다. 수스미타 아르프 기자가 카트린 엘거 기자와 공동으로 진행한 탐사보도로, 이슬람 인플루언서들이 틱톡(TikTok)을 통해 어떻게 초보수적인 여성상을 유포하고 있는지 심층 취재했다. 이번 탐사보도는 AI 기술이 없었다면 취재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슈피겔은 직접 개발한 소셜 미디어 AI 도구로 6000개가 넘는 독일어 틱톡 동영상을 분석했다. “AI가 없었다면 2주 동안 밤낮으로 틱톡 동영상만 보고 있었을 거예요.” 아르프는 말했다.
취재진은 틱톡에서 여성과 이슬람에 대해 독일어로 이야기하는 이슬람 인플루언서 12명을 추렸다. 그들의 틱톡 계정 동영상에서 오디오 트랙을 추출해 텍스트로 변환하고 캡션과 첨부 텍스트도 모았다. 그런 다음 AI 도구에 입력해 텍스트를 분석했다. AI는 질문에 대한 답변뿐만 아니라 정확한 특정 인용구 구간과 원본 동영상 링크를 함께 제공했다. 기자가 링크를 클릭하면 해당 비디오의 정확한 발언 시점으로 단번에 이동할 수 있어 확인 시간이 단축됐다. 아르프는 “AI 도구는 텍스트를 이해하고 검색하는 데 도움이 됐다”며 “수많은 틱톡 동영상 콘텐츠의 전체적인 개요를 파악했다”고 했다.
하지만 취재진은 AI가 요약한 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AI가 제공한 해당 영상들을 직접 시청했다. 아르프는 “AI가 요약한 것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AI를 활용해 대규모 틱톡 영상을 분석한 탐사보도는 1월31일 발행됐고, 이후 팟캐스트로도 제작됐다. 슈피겔은 AI를 이용해 심층 취재한 과정을 별도 기사로 공개했다.
AI 팩트체킹 도구 만들어 실무에 적용
정확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는 슈피겔은 팩트체킹만 담당하는 큰 부서가 있다. ‘도큐멘타치온(Dokumentation)’으로 불리는 이 부서에는 70여명이 일하고 있다. 의사, 변호사, 회계사, 아랍어나 러시아어 전문가, 물리학자, 역사학자, 생물학자 등 각 분야 전문가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모두가 전임 팩트체커는 아니다. 기사를 위한 조사 업무를 수행하고 방대한 언론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한다. 도큐멘타치온은 AI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별도 팀을 두고 있다. 이 팀은 2년 전 자체 AI 팩트체킹 도구를 만들어 실무에 적용하고 있다.
이 AI 도구는 온라인 출처를 자동으로 검색해 추론 과정 및 출처 링크와 함께 잠재적인 오류를 화면에 표시해 준다. 예를 들어 AI 도구에 ‘서울은 태국의 수도다’라는 문장을 넣으면 ‘이 주장은 틀렸다. 서울은 한국의 수도다. 검색의 근거는 위키피디아고, 태국의 수도는 방콕이다. 방콕이라는 근거는 이런저런 웹사이트에 나와 있다’는 식으로 답변한다.
간단한 문장을 예로 들었지만 이 AI 도구는 장문의 기사가 많은 슈피겔에 맞춤형으로 만들어졌다. 라이스만은 “잘못된 연도 표기나 부정확한 표현 등 단순한 사실 오류 이상을 찾아낼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며 “장문의 기사라도 문맥과 의미를 이해한다. 사실 자체가 맞더라도 서로 모순되거나 이상하게 배치된 부분까지 지적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시중에서 AI 툴을 구매할 수도 있는데 슈피겔은 왜 자체 도구를 개발했을까. 할루시네이션(환각 현상)을 최대한 줄이고 기밀 유지를 위해서다. 아르프는 “가령 법적 사건의 방대한 수사 기록을 업로드할 때, 외부로 데이터를 보내지 않고 보호된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가 직접 설정할 수 있어 더 신뢰할 수 있고 더 투명하다”고 했다. 슈피겔은 연말까지 AI 팩트체킹 도구를 뉴스룸 전체로 확대할 예정이다.
기술 혁신이 가져온 AI는 저널리즘을 변화시키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라이스만에 물었다. “단순한 사실을 전달해서는 AI와 경쟁할 수 없어요. 기계가 줄 수 없는 신뢰와 영감을 주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AI가 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