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은 지금 무엇으로 사는가?

'제1회 JAK 1030 콜로키엄' 지상 중계




   
 
   
 
<편집자주> 한국사회에 저널리즘은 있는가?‘저널리즘의 위기’를 넘어 '저널리즘의 실종'으로 표현될 만큼 한국 언론의 현실은 암울하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뉴미디어의 등장 이후 매체는 더욱 다양해지고, 새로운 매체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자들의 몸부림은 처절하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의 기자들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을 목도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그 동안 간과됐던 문제였다. 한국 언론에 몸담고 있는 기자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진지하고 솔직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았다.



제목 = 제1회 JAK 1030 콜로키엄

일시 = 2005.08.31 오전 10:30

장소 = 기자협회 회의실



<집담회 참석자/가나다순>



김용길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

김재호 (전북일보 정치부 차장)

신경민 (MBC 보도본부 논설위원)

안수찬 (한겨레 문화생활부 기자)

이재강 (KBS 시사보도팀 기자)

이희정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사회 = 이상기 한국기자협회 회장




이상기 = 처음으로 하는 기자협회 콜로키엄입니다. 1030은 10시 30분에 시작하자라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매번 현안에 대해서 논의를 하되 저널리즘 범주에서 가능한 한 벗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기자협회는 원래 저널리즘을 발전시키고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 앞장서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차기 회장도 이어갈 수 있도록 인수인계 할 것입니다. 매주 수요일 혹은 목요일 10시 반은 기자협회 사무실은 콜로키엄이 열린다고 생각하고 준비하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주제는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상당히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주제입니다. 처음이니까 방향을 잡아가면서 얘기를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기자들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선 지금 기자들의 현주소부터 진단해 봅시다. 기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일을 하는가를 짚어보도록 하죠.



김용길 = 우선 기자협회에서 1030 콜로키엄의 첫 문을 열었는데 꾸밈없는 대화의 마당을 열었다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회원으로서, 기자로서 콜로키엄이 열리는 기협 회장실이 현업자들의 소통의 창구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 기자의 현주소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처참합니다. 기자협회보 등 미디어지면에서 다뤄지지 못한 것들이 콜로키엄에서 속속들이 난상토론으로 표현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은 솔직히 막막합니다. 기자는 뉴스로 하루를 열고 뉴스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뉴스상품을 제대로 생산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가슴이 무겁습니다.



당당한 이 시대 저널리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이 최후의 자부심인데 그것마저 점차 여의치못한 것 같습니다. 매체환경의 급변이나 수용자의 욕구 변화가 거세다지만 주체적으로 헤쳐나가면 그 질풍노도를 이겨낼 수 있는 솔루션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눈에 잘 안보이지만,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희망의 얘기를 여기서 나눴으면 합니다.



저널리즘 본령에 언론이 충실하지 못해



이재강 = 기자들의 현주소는 기자라는 직업이 현재 언론에 위기와 함께 직업적 위기까지로 나타나는 상황이라고 진단합니다. 시장의 위기가 가장 가시적이지만, 기자로서 생각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위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널리즘의 본령에 언론이 충실하지 못하고 있고요. 매체를 만들어가는 기자들도 같은 맥락입니다. 아시다시피 위기를 부른 근본적이고 중대한 요인은 자본의 영향입니다. 자본의 영향력이 기자로 하여금 자본과 좀 더 밀접하게 활동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향은 사기업인 신문에서 먼저 나타났습니다. 작건 크건 언론에서 자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기자들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기자가 추구해야 할 제1의 가치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인데, 그 외의 걸림돌도 많지만, 자본이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자본이 진실추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죠. 기자는 매체 특성에 맞는 기사를 잘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전문성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방송은 리포트를, 신문은 기사를 씁니다. 따라서 시청자나 독자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전문가다운 지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자리에서 논의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윤리문제 입니다. 과거에 비해 기사를 쓰는 실력과 지식은 지속적으로 발전했지만, “과연 기자로서의 윤리와 정체성은 발전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를 갖고 있습니다.



안수찬 = 언론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퇴화하고 있는 영역이자 퇴화되는 기능입니다. 역사적으로 반세기 혹은 일제시기까지 포함하면 한 세기 동안, 한국에서는 미디어 자체가 담론을 형성하는 권력이고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영향력이 가장 컸습니다. 특히 1960년대까지는 미디어가 한국사회를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정치와 경제 영역을 중심으로 나름의 ‘합리화’ ‘체계화’를 진전시키면서 언론이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권력이 주도하는 대로 혹은 정치권력의 이해에 맞게 행동하게 됐습니다. 감시와 견제의 세력으로 자리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회 다른 분야의 성장과 더불어 미디어의 고유한 영역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이를 확보해야 하는데, 비정상적으로 그저 권력에 빌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80년대까지 그런 경향이 지속됐고, 권력에 영합하는 방식의 생존이 불가능해진 지금에 이르러 갑자기 미디어의 고유한 영역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상황입니다.



현재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정치, 투명성을 높여가는 경제 등과 더불어, 동시에 이들을 감시하는 맥락에서 기자라는 직업의 위치를 본격적으로 모색하는 시기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기자 사회에서 혼란을 불러오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데, 한국 언론계에 주어진 마감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타임 테이블에 맞춰 한국언론이 장차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에 대한 현명한 방안을 내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신경민 = 여러분들이 큰 말씀과 구체적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콜로키엄에 대해 설명하자면(신경민 해설위원은 이상기 회장과 함께 콜로키엄 개최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제기한 바 있다/편집자) 기자로서 우리 자신을 보자면 우리의 문제가 많고, 우리의 문제를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이었지만, 막상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잘 모른다’는 결론으로 봉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이자리입니다. 다른 자리에서 다양한 위치의 사람들과 같이 토론 등을 해보면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우리 문제에 대해서는 얘기가 잘 안됩니다. 따라서 콜로키엄이라는 형식을 도입해 우리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끼리 모여 얘기해 보는 자리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우리 기자의 문제는 굉장히 많습니다. 시장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저널리즘도 한번도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시장의 지배로 인한 저널리즘의 위기라는 단계에 들어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해방 전후 지사적 저널리즘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군사정권시절 독재에 저항하는 시대를 거치면서 지속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기자는 샐러리맨화 돼있습니다. 지사적 풍모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현재에는 지사적 풍모가 기자에게 필요도 없고, 있지도 않고, 있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학술회나 토론회에서 대학교수들과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정리할 수 있는 기회 없었습니다. 교수는 기자를 모르고 반대로 기자는 교수를 모릅니다.



기자들에 관한 사례 질문들은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기자들은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오는가. 대학에서 배운 학문이 진정으로 기자생활 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입사시험이 적절한 절차인가. 기자들을 처음부터 사스마와리 시키는 게 적절한가. 기자들이 가려고 하는 취재파트는 어디인가... 모든 것이 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정치부 기자가 목표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정치부는 물론이고 문화부, 국제부, 특파원 등 다양화돼있습니다. 출입처 가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보에 대한 고민, 법률적 책임의 문제 및 기사의 스타일의 문제 등 중요한 문제가 많은 데, 학문적으로나 실무적으로 정리된 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촌지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촌지 문제는 80년대 미국언론이 CHONJI 라는 말을 쓰면서, 거론됐습니다. 많이 없어졌지만, 지금도 역시 다른 형태로 남아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사소한 문제 같지만, 취재원과 술과 밥은 어떻게 먹어야 되는가도 문제죠.



또한 선후배, 새로운 매체에 따른 대응문제, 편집의 문제, 스타일의 문제 등을 비롯해 미국, 독일과 우리의 방송, 신문의 기사는 어떻게 다른가. 기사의 스타일에 따라 기자의 실력이 달라지는 것 아닌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정리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해법이 나올 지는 모르지만, 방향을 얘기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거대담론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우리가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한 가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저널리즘을 해보기도 전에 위기라고 하는 문제를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자윤리와 현실 상충 '문제'



김재호 = 기자의 현주소라는 문제는 고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주제입니다. 기자의 현주소는 이재강 기자가 지적한 것처럼 기술적 문제와 지식의 문제, 그리고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자가 첫째 지사적 기자로서의 기자든, 사보를 취재하는 기자든, 전문적 지식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모든 언론사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또 기자로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 윤리문제입니다. ‘과연 우리 기자들이 과거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저번 이상호 기자 사건에서 나왔지만, 기자가 극복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윤리적인 부분에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많습니다. 지방기자 입장에서 볼 때 문제가 많습니다. 당연히 저야 부장은 아니지만, 근접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회사가 먹고 살기도 힘든데,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우리 회사의 젊은 기자들은 안받기로 했지만, 나이든 기자들은 가끔 뜨끔합니다. 기자협회보에서 접대 골프도 촌지라는 광고를 봤는데, 여전히 일선 기자들은 접대 골프를 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윤리적인 것과 현실적인 부분이 상충하고 있는 문제죠.



이번 지방신문발전 지원대상에서 5개사가 선정됐는데, 상당히 중요한 잣대가 재정적 문제와 사주와 기자의 도덕적 문제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지사로 가면 광고 압박 등으로 힘이 드는 것이 사실이죠. 5개사 밖에 지원 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그런 윤리적인 문제입니다. 이 콜로키엄 자리가 기자들이 어떤 부분을 추구할 지 보여주는 현실적 대안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기 = 기자협회 41주년 기념호에서 일선기자들에게 기고를 받았습니다. 다양한 의견 속에서도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답답하다” 였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사명을 다해 보람찾겠다는 말이 많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아직도 기자직보다 역사의식과 사명감을 갖는 직업이 없습니다. 물론 많은 비판도 받지만, 우리가 스스로 택한 직업으로서 기자는 기본적 양심을 지키려고 바둥거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기자생활을 처음 했을 때와 지금과의 비교를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경민 = 저는 군사 독재시대에 기자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쓰는 것 자체가 통제를 받았던 시대였고요. 지금 데스크 급이 됐을 때는 없어졌는데, 그 때는 취재를 할 때 기자가 정권이 싫어하는 데를 가면 즉각 체크가 되고, 기관으로 불려간 기자도 많았습니다. 기사를 쓰면 끌려가기도 했고,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화로 항의 받고, 조사 받거나, 정식으로 불려가기도 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시작한 기자들은 이해하기 어렵죠. 말지 사건에서 나왔듯이 보도지침이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일부 기자들에겐 기자라는 직업이 공직으로 가는 디딤돌 역할을 했습니다. 지역구 공천 받으려고 기자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억압 받고 한편으로는 리쿠르트 소스로 작용한 것이 기자라는 직업이었죠.



또 제가 입사했을 때는 여기자가 2명 있었습니다. 수가 적어서 여자들 만이 느낄 수 있는 문제를 기사로 녹이는 것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시대가 달랐습니다. 전두환 때 월급이 많이 올랐죠.



취재원에 있어서 NGO와 같은 취재원은 없었습니다. 매체도 9개 밖에 없었고. 그래서 엠바고도 잘 지켜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취재원과의 관계도 지금보다 훨씬 가까웠습니다. 본인이 열심히 할 경우 취재원과 공사간 굉장히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죠. 그것이 물론 기사로 왜곡되는 등 긍정 부정 다 있었지만, 그때가 취재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습니다. 지금의 후배 기자들과는 다른 관계를 형성했으니까요.




   
 
   
 

 

이상기 = 신경민 위원은 방송기자여서 영상과 관련이 많은데요?



신경민 = 신문과 방송에 있어서 박정희 정부보다 전두환 정부에서 방송뉴스의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ENG 카메라가 도입됐고, 칼라방송이 되면서 방송뉴스 내지는 방송에 대한 폭발적 수요가 생겨서 뉴스도 많이 보고, 그러면서 방송뉴스가 주목을 받았습니다. 카메라가 오지 않으면,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어요. 신문이 방송의 우위였던 것이 그 때 비슷해진 상황이 됐습니다. 물론 경쟁은 지금보다 훨씬 덜한 것이 매체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2개의 방송사와 1개의 통신사를 비롯해 총 9개 밖에 없었거든요.



이상기 = 안수찬 기자. 입사한 지 얼마 안돼서 문화가 다를 것으로 보이는데요.



안수찬 = 저는 97년 가을에 입사했습니다. 입사 이후 줄곧 제가 쓴 기사를 스크랩해놓았습니다. 이를 살펴보면, 과거에 비해 신문기사의 ‘질’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낍니다. 과거 사회면 박스 기사의 경우, 일종의 ‘해프닝성’ 기사도 읽을거리의 맥락에서 충분히 지면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독자는 물론 신문사 내부에서도 더 높은 품격을 갖춘 기사를 원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기획기사, 심층기사가 늘어나면서 신문기사의 규격과 품질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방송, 신문 모두 속보 보다 심층 탐사 보도를 집중하고 있는데, 다만 시스템이 여기에 못 따라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심층 기획을 중심으로 삼으려 하면서도, 독자들이 요구하는 바에 여전히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면도 있습니다. 언론 내부의 기준으로 보면 일정한 발전을 이뤘지만 독자의 눈은 그보다 더 높아진 것도 이유가 되고요. 높아진 미디어 수준 및 그보다 더 높은 독자의 눈높이를 ‘과거의 관성에 젖은’ 기자들이 못 따라가는 이유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기자들 개인의 전문성의 문제라기보다, 그런 기자 개인의 전문성을 네트워크화하는 문제인데, 그런 부분에서 각 언론사가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용길 = 저는 91년 봄에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신문 편집자로서 뉴스를 만지고 정보의 경중완급을 가리는 코디네이터인셈입니다.오늘 아침에도 국제면 편집자로서 밤새 들어오는 외신사진을 모니터했습니다. 요즘 허리케인 때문에 외신사진을 잘 챙겨야하는데 오늘은 1천3백장 정도 봤습니다. 약70%가 미국에서 보내온 것이에요. 하지만 아프리카의 기아는 늘 지속된 참상이었지요. 미국의 사태는 중시되고 아프리카의 상존하는 고통은 왠지 외면하게 됩니다. 저 같은 편집자부터 뉴스의 관행에 길들여졌습니다. 스테레오타입에 빠져드는 거죠. 대학시절에 기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저항 저널리즘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몇년이 흐른 뒤 어느새 저항저널리즘의 날은 무뎌졌습니다.



기자는 자기분야의 전략가가 되는 것이 절실합니다. 위기 속에서도 저널리즘의 역할은 항상 존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독자들은 웰빙정보, 맞춤식 체험정보를 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시대와 역사를 분석하고 해석하고 전망해주는 총체적 저널리즘도 원하고 있습니다. 이를 함께 만족시켜주는 매체편성 전략가가 필요한 상황인데, 그것을 내가 하고 있는가, 언론사가 하고 있는가, 한국의 기자들이 하고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죠.



기자 모두들 정보 전략가를 꿈꾸고 있는데,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회의적인 것 같습니다. 기자협회가 원칙을 세워준다면 좋겠지만 , 현실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공론장의 생산자 관리자로서 쉽게 흔들리면 안되는데 요즘처럼 기자의 신분이 가벼워지고 위태로운 적도 없었습니다. 사회와 저널리즘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동요를 막는 어떤 룰이 필요합니다.그런 룰 마련하기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희정 = 옛 기억을 되살리자면, 저는 91년 7월에 입사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 때 당시 한국 언론은 기존에도 경쟁은 존재했지만, 안정된 경쟁이 무한 경쟁으로 변화되는 시기에 입사했습니다. 인쇄시설을 전국 곳곳에 만들어 전국에 뿌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일보부터죠. 조석간 하겠다고 했던 시절입니다. 결국 조석간 발행하면서 한국일보가 훗날 어려워지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기자 초반 시절의 신문산업의 변화는 무한 물량 경쟁이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습니다. 신문사간 지국 인수하면서 살인사건까지 났습니다. 한편으로는 지면이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올림픽 때 32면이 잠깐 나왔다고 들었는데, 기존에는 28면이었던 지면이 90년대 32면에서 48면까지 늘어났고 게다가 섹션까지 더해져 업무로드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제가 느꼈던 것은 그런 물량 경쟁에 대응할 수 있는 회사의 조직이나 인력, 특히 인력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물량 경쟁에 뛰어들면서, 아까 안수찬 기자의 경우에는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기사의 질에 대한 요구 사항이 내외적으로 상당히 높아진 그런 내용을 말씀하셨는데, 오히려 제가 느끼는 것은 제가 기자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그 기간만 단순히 비교해 보자면, 기사의 질이 대단히 떨어졌던 그런 시기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질의 기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이를 테면 신경민 선배의 말씀처럼 “우리가 처음에 기자생활 했을 때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출입처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출입처와 관계가 아주 돈독했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그 부분을 나쁘게 이야기 하면 그만큼 유착이 심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 옛날 같으면 한 출입처를 담당하면서 일주일 동안 충분한 취재를 거쳐서 이야기가 되는 기사를 일주일에 한 두건 정도 생산을 했다면, 요즘은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출입처를 동시에 출입하면서 매일매일 일정량의 기사를 쏟아내야 되는 그런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그런 형태로 봤을 때는 기사의 질이 떨어졌다는 측면이 있다는 거죠. 물론 전체적으로 언론에 대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그런 기사의 질이라는 측면에서는 발전했을지 모르지만, 기자 개개인이 하나의 기사를 위해서 취재하고 준비하고 고민해서 기사를 생산해내는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은 질이 떨어졌다는 측면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 점에서 저도 어려움을 가장 많이 느끼는 편입니다.



물론 90년대 중반 이후는 또 완전히 다른 상황, 즉 그 안에서의 경쟁이 아니라 이제 미디어의 외연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보고요, 다시 이제 요즘 우리끼리의 무한경쟁을 하느라 스스로 실종시켜버리고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았던 저널리즘의 문제로 다시 심각하게 이야기 하게 된 현실이 상당히 자업자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김용길 = 자업자득에 동의!



이상기 = 좋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논의해야 할 내용을 대충 말씀 드려야겠네요. 여러분들께서 현재기자와 과거기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요, 그 다음에 기자들의 자화상과 타화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기자란 직업을 정의해보면 어떨까요. 이를 테면 요즘에 기자를 라이팅 머신(writting machine)이라고 부르는 말도 들리는데 말이죠. 아니면 지사냐 전문가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의 기자가 어떠할 것인가’ 정도를 논의하도록 하죠.



김재호 = 저 같은 경우에 88년에 입사를 했는데요, 그 때만 해도 공채를 통해서 입사했는데, 고등학교 하나를 통째 빌려 시험을 볼 정도로 지원자가 많았습니다. 요즘은 교실을 하나 빌려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지원자가 줄었습니다.

신문 전체적인 발전으로 보면 아까 한국일보가 시작했던 분공장 체제가 시작됐죠. 90년대 중반경에. 그 여파로 우리 신문사 같은 경우도 윤전기를 지방에 배치하느라 손해를 봤습니다. 94~5년경에는 중앙일보가 섹션신문을 만들어 타 언론사에 반향을 일으켰죠.



그리고 또 기술적인 문제. 납 활자가 90년대 초반까지 있었는데, 이후로 컴퓨터로 대체가 됐습니다.

제가 입사 초년병 당시만해도 기자는 굉장히 소수였습니다. 81년부터 대량 언론인 해고하고 통폐합도 있었고, 1도 1사 체제의 소수 언론사만 있어서 출입처에 가보면 기자 10명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지방도 한 기자실에 30명이 넘습니다.

지금은 브리핑제를 많이 도입을 했고요, 김두관 씨가 남해군수를 할 때 기자실을 처음으로 폐쇄를 했습니다. 그래서 기자실 문제가 그때부터 제기 됐습니다.



그 다음에 최근에 기획관련 기사를 많이 보도 하는데, 예전엔 많지 않았는데 섹션 신문이 도입되고 소위 지방시대가 열린 90년대 중반 이후 지방에 대한 기획기사가 많아졌습니다.

광고면에서 보면, 중앙이든 지방이든 굉장히 바뀌었죠? 1면에 세로로 세우기도 하고. 광고주의 압력이 많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것이 상당히 주목할 만한 과거와 현재의 현상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여정부 들어서라고 얘기하기는 힘들지만, 언론매체들 마다 반성이 많아졌습니다. 기자협회보라든가 미디어오늘이라든가 기자들의 잘잘못에 대해 많은 지적이 있어 윤리의식 높아진 듯합니다.



이상기 = 한꺼번에 얘기하셔도 되고 나중에 관련 사항이 나오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좋습니다.



기자실 고스톱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이재강 = 저는 91년도에 입사했는데요, 그때하고 지금하고 달라진 것을 이야기 하자면 일단 언뜻 생각나는 것은 기자실에서 고스톱 치는 것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 같아요.(모두 웃음) 저 입사했을 때만 해도, 경찰기자 생활을 했지만, 기자실에서 고스톱을 상당히 많이 쳤거든요. 저는 그런 것을 안 좋아해서 치지는 않았지만, 어떤 기자실을 가더라도 그 때는 많이 쳤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때하고 지금하고 14~5년 지나면서 달라진 것을 생각해 보면 기본적으로 언론하고 권력과의 관계 자체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당시 KBS만 해도 정치권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고 판단하는데, 물론 제가 그 당시 주로 사건 담당 기자라 영향력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정치권력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영원불멸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지금 돌아와서 생각해 봤을 때는 완전히 변했죠. 지금은 정치권력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영향력이 없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매체환경이 많이 변했습니다. 입사 때만 해도 대학생들에게 신문 방송 중에서 어떤 기자가 될 거냐고 물으면 그 때는 신문기자가 많았습니다. 방송사를 가려면 피디를 해야 되고 기자를 하려면 신문으로 간다는 식의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굉장히 많이 변했습니다. 방송뉴스의 영향력이 많이 커졌고, 반대로 신문기자의 선호도라든지 매체 영향력은 줄은 것 같습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 제가 입사했을 당시 인터넷이라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93년도쯤 마포서를 출입할 때였는데, 서강대에서 무슨 사건이 있었어요. 전산실에 해킹이 있었는데, 서강대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망이 뚫렸다는 사건이었습니다. 93년도에 인터넷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기자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기자실 안에, 그 당시 도대체 인터넷이라는 게 뭔지 서강대에서 연구자들이 설명을 해줬지만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기사는 썼지만, 이후 불과 몇 년 만에 인터넷이라는 게 기자 일을 하는데 그렇게 많은 영향력을 주는 매체로 등장할지는 몰랐죠. 이런 엄청난 매체 환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 큰 변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 그것과 별도로 문제의식을 기자들이 가지고 있느냐는 측면에서 본다면 기자들의 문제의식이 많이 줄었다고 봅니다. 과거를 보면 어두웠던 70년대에 동아, 조선 기자들은 자신들의 양심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직업을 내놓는 소신이 있었잖습니까? 물론 지금은 권력 자체의 성격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그것을 대체하는 권력으로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게 이른바 자본이죠. 기자들이 기자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영업을 해야 되는 경우가 생기는 상황입니다. 존재감으로 본다면 굉장히 치명적인 것을 요구 받고 있는 것인데, 과거 조선 동아 기자들이 대항했던 것이 정치권력에서 이제는 자본권력으로 넘어간 상황으로 봅니다.






   
 
   
 

 

과거와 달리 법률적 책임 커진 것 큰 변화



신경민 = 몇 가지 지적하지 않은 것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1면에 정치기사가 적지 않지만, 예전하고는 트랜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과학과 기술기사도 많이 들어가고요. 스포츠, 문화, 영화 등이 일면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완전히 달라진 상황입니다. 그것을 확실히 느낍니다. 무한경쟁시대에 들어가면서 편집에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언급하지 않은 것이 바로 노조입니다. 언론사에 노조가 등장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것도 긍정과 부정적 측면 다 있습니다.



또 NGO가 중요한 취재원으로 등장했습니다. 기자들에게 취재지시를 하면 NGO취재나 전문가 취재를 많이 해옵니다. 많이 달라진 것 같고요. 또 하나는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지만, 입사제도에 대한 반성이 있었습니다. 약간씩 회사마다 입사 방식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전문기자 제도 및 경력기자 선발에 있어 새로운 방식이 생겼습니다. 중앙 조선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사도 다른 형태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굉장히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아주 옛날에는 60년대 기자들이 회사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독재 정권 이후에는 언론 탄압이 일환으로 기자들이 회사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80년대에 그게 굳어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이 최근에 와서 경력기자 도입이라든가 그런 걸로 나타났습니다.



무한경쟁 중에 하나가 아침 무료지도 하나의 특징으로 나타났습니다. 뉴욕 워싱턴에서 하거든요. 서양에서 들어와서 우리도 하는 것 같은데,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가 법률적 책임이 굉장히 강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두환 정부 때 언론중재위를 신설했는데, 그것이 법률로만 존재하다 90년대 들어서 중재사건도 들어가고 중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법원으로 가는 경우가 굉장히 늘어나면서, 지금은 제가 데스크가 되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저도 그렇지만 취재기자들도 잘 안 움직여요. 가서 쓰라고 하면 “명예 훼손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질문을 하는 기자들이 굉장히 많고, 사실 저도 좀 두려운 대목이죠. 어떤 경우 이건 미국 법정에서 이기는 경운데 법제가 달라서 한국법정에서는 질 것이 뻔한 사건이 있어 막상 기자들에게 “가서 써!”라고 말하지 못하고 위축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중재제도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재제도를 떠나서 법정으로 가면 언론이 상당히 불리합니다. 미국법하고 한국법하고 전혀 달라요. 한국에서는 지는 것이 태반입니다. 개인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좋은데, 미국은 수정헌법 1조에서 ‘언론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고 그래서 언론의 힘이 강합니다. 최근에는 민사 형사 소송뿐 아니라 자살보도준칙까지 나와 있어서 이런 것은 말하자면 법률적 관행이 굉장히 많이 바뀐 것 같아요. 20년, 30년 전, 10년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었어요.



제가 83년에 미국 취재를 갔는데, 그 때 미국 언론은 전산화 돼 있었어요. 그때 가서 봤을 때, 지금은 만날 쓰는 것인데, 생전 처음 본 것들이었어요. 그러다가 우리는 10년 후에 전산화가 됐어요. 그만큼 미국하고 우리하고 큰 차이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전산화는 옛말이고, 디지털화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신문과 방송 모두. 게다가 HD까지 나왔고. 이런 디지털화는 끝을 몰라요. 기술의 발전은 아무도 짐작을 못 할거에요.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한다면 한참 말해야 되요.



NGO의 부각, 시민저널리즘의 등장 가속



안수찬 = 제가 더 보태고 싶은 말이 있는데, 시민 저널리즘 부분입니다. 이 시민저널리즘의 등장이 한국 언론의 변동에 있어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시민사회가 80년대 후반부터 성장해서 90년대 들어 일정한 궤도에 자리잡으면서, 저널리즘 분야에도 시민사회의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특히 시민사회는 신문, 방송 등 언론 일반을 권력에 대한 비판자, 감시자로 보지 않고 시민사회에 대항되는 '기성'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성언론이 ‘자신들 만의 이야기’, ‘그들의 일’에 대해서만 보도한다는 관념들이 급속하게 확장됐습니다. 그 결과 몇몇 인터넷 매체들도 등장했지만, 사실은 기성의 신문과 방송들도 시민 저널리즘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시민참여방송이랄지, 시민 VJ라든지 등의 형태로 말이죠. 특정의 고유한 영역으로 여겼던 저널리즘에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이 개입, 감시하고, 직접 그 텍스트를 생산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것들이 기자의 위기 및 언론의 위기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신경민 = 하나만 더 보태자면, 최근 미국에서는 블로그 저널리즘이 굉장히 강합니다. 몇 백명 독자에서 시작해서 많으면 몇 만명 독자까지. 방송으로는 POD casting이 있는데 라디오입니다. 오디오 블로그 개념입니다. 가면서 듣는 것입니다. 쉽게 만들어 올려놓으면 쉽게 다운 받아 급속도로 퍼뜨립니다. 시사적인 것부터 음악도 장르별로 선택합니다. 소재는 무한대. 미국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방송도 위기라고 하는데 '티보'라고 있어요. 광고를 삭제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것이죠. 디지털이 "니네들만의 언론은 우리가 싫어한다"는 시민사회의 영향력 커지는 것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라크 전쟁의 경우 최일선에 나가 있는 병사가 블로그를 만들어서 팬타곤 소식을 듣지 않아도 직접 전선을 둘러볼 수도 있었고.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블로그가 전선까지 중계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죠.



언론의 '비아냥'이 공신력의 '비아냥'으로 되돌아와..



김용길 = 저는 이런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공론장을 제공하는 근래의 뉴스담론이 뉴스 소비자에게 점차 공신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느끼잖아요. 우리가 오늘 만들어 놓은 뉴스해설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 대신에 뉴스를 재미있는 쪽으로 혹은 섹시한 쪽으로만 만드어가는 것. 다시 말하면 진지한 설득력, 매체적인 신용성은 왜 자꾸 떨어지는가. 스킬은 좋아지고 클릭하는 사람은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왜 미디어는 경박해지고 그것이 기자의 위기와 연관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해방이후, 한국 신문들이 제대로 발행된 이후 요즘처럼 기자로서 쓰지 못할 기사가 없고 비판하지 못할 대상이 없습니다. 정치권력에 대한 두려움은 옛날 이야기로 되어갑니다. 오히려 언론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말까지 듣습니다. 그런데 요즘 지면의 행간에서 배어나오는 것은 비아냥이 많아요. 비판 저널리즘의 날카로움이나 향기가 변질돼서 온통 비아냥 저널리즘이 돼버렸습니다. 대책도 없으면서 뚜렷한 대안도 없으면서 나라와 시대의 미래에 대해 잿빛 비아냥만 횡행합니다. 이 잿빛 저널리즘에만 갇혀있다보니 비관론만 가득합니다. 원없이 비아냥거린다고 우리가 속시원해졌나요? 아니에요. 오히려 공신력에서 우리 미디어업계가 비아냥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비판이라는 것이 또 다른 우리의 함정이 아닌가. 왠지 이 사회에서 언론이 차지하고 있는 바탕을 갉아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비아냥이 우리의 또 다른 함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희망과 청사진 제시로 밝은 매체로 인상을 바꿀 필요도 있습니다.



이재강 = 요즘 신문기자를 오래해 온 분들의 한 사설, 칼럼을 보면 너무 뻔해요. 처음 시작은 예컨대 컵으로 시작하든, 휴대전화로 시작하든 다양하나, 결론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난이에요. 일반인들이 봤을 때 그 이상은 돼야 하지 않나요? 색다른 결론이 나오던지. 이 정권하에서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주제도 특정한 영역에 대해 좁혀졌고, 그 영역에서 나오는 칼럼도 오래된 기자생활을 하신 분들의 경험과, 전문성과, 능력에 비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재호 =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 시절부터 줄기차게 받아왔던 비난을 지금까지 받아오는 것이거든요. 그 때 당시 정몽준씨와 러브샷까지 갔다가 이러저러 대통령이 됐는데, 지금 상황도 비슷합니다. 대통령이 항상 말하는 것은 후보시절부터 그렇게 해서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대연정도 밀어붙이면 성공한다는 논리와 연결됩니다. 하지만 전략부재죠. 언론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해 언론 대부분이 비아냥대고 있는데 그것을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잘 못하고 있는 것이죠. 아직도 이 땅에는 보수 세력이 많아요. 대통령 의도와는 다르게 원칙, 윤리와는 반대로 가야 이익을 얻는 세력이 많은데, 노 대통령이 그냥 뒤집으려고 하는 것은 전략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이상기 = 자 그럼 기자들의 자화상과 타화상을 간략하게 말해 보도록 하죠. 제목을 뽑는다고 생각하고.



이희정 = 그 어려운 주제를 간략하게 되나요. (하하하)



안수찬 = 방송이나 몇몇 메이저 신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언론 종사들이 현재의 적은 임금으로만 살아가야 한다는 문제에서 비롯된 실존적인 위기가 하나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자 개개인이 나쁘게 말하면 명예욕, 좋게 말하면 사명감을 채워줄 필요가 있는데, 이런 욕구의 해소도 쉽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위해 오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죠. 이 문제는 나 개인의 차원에서는 절대로 답이 안 나올 문제지만, 동시에 나 말고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언론사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는데요. 수업을 듣는 대학생들이 글을 참 잘 씁니다. 이들의 글 쓰는 능력은 탁월합니다. 저하고 비교해서도 그렇고, 외람되지만 선배 세대들과 비교하자면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에 대한 감각들이 탁월한 거죠. 이른바 ‘논술세대’의 특성이기도 할테고, 온라인을 통해 평소에 자신을 글로 표현한 경험이 많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기자를 지망하는 정서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자유, 꿈의 실현에 대한 욕망에 대한 것입니다. 반면 사회역사 의식이 대단히 희박합니다. 개인 실현의 욕망이 지난하고 어렵게 여겨지는 판검사나 의사와 같은 직업이 아니라, 비교적 자유분방하다고 알려진 언론분야에 몰리고 있는 거죠. 특히 방송 지망생이 늘고 있는 것도, 물론 방송의 영향력이 높아진 탓도 있겠지만, 동시에 짧은 시간 안에 자기 자신을 대중 앞에 등장시키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다고 봅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들이 언론사에 들어오게 되면 선배 세대들보다 더 쉽게 좌절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인문학적 교양이나 사회 역사적 의식이 아직은 얕은 상태에서 그들의 실존적 욕망이 현재 한국 언론 시장에서 과연 쉽게 허용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 역시 좀 비관스럽습니다.

이들은 기성 언론을 비판하면서 블로그나 대안언론을 쫓아가면서도, 실제로는 언론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고, 이런 경향이 과거보다 더 강화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언론에 대한 과소포장과 과대포장이 엇갈리고 있는 거죠.



저널리스트는 분명한 자신의 논리 철학 가져야



이희정 = 제가 느끼는 자화상은 과거와 비교해보면 항상 기자하면서 머릿속에 있는 것은 선배들이 “기자는 하나하나가 언론매체다. 한국일보를 대표하는 이희정이다. 그래서 당당하고 책임져야 한다. 너를 통해 한국일보를 평가하고 언론을 평가한다. 따라서 그런 의식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많이 들었는데요. 그 의식으로 10년 넘게 살아왔는데요, 그 부분이 도움이 됐어요.



외국의 경우 언론인 누구라는 것이 더 앞서잖아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건에 맞는 언론사를 찾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는 분위기기 형성돼 있지만, 우리는 기자 누구이기에 앞서 어느 신문의 기자, 어느 방송사의 기자라는 것이 앞서고, 이 사람이 그만 두는 순간 저널리스트로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직업 자체를 잃게 되는.. 어떻게 보면 왜곡된 환경이 형성되고,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과연 우리가 기자라고 불릴 수 있는가에 심각한 회의가 듭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미디어 분야를 맡고 있어서 오히려 그런 것들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데, 일부 언론 동료 기자의 기사를 보면 때론 팩트 자체를 나하고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거나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그런 현상을 보면서, 과연 이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기자로서 양심을 걸고도 이 사안을 이렇게 판단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왜 그런지 물어보고 싶지만 상도의상 물어보지는 않았는데요.



저는 시시비비를 그 사안마다 가려서 보도하는 것이 기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100%는 아니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는데요. 이런 식의 노력을 하는 기자가 바보취급 당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거죠. 섹시하게, 선명하게, 확실하게 긁어주거나 때려주는 기자가 능력 있는 기자가 돼버린 현실이고, 일부 언론이 취하는 전략이 먹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널리스트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념에 의해 분화된 언론이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어떤 언론사에 있더라도 저널리스트로서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 자신의 논리와 철학을 분명히 가져야 한다는 거죠. 회사의 논리에 얼렁뚱땅 젖어서 거기에 따라가 놓고 그에 대한 비판의 몫은 다시 회사의 몫으로 돌려버리고 저널리스트로서의 존재 자체를 실종시키는 부분은 심각하게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수찬 = 정확합니다. 매체는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기자 개인은 충성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때의 충성경쟁이란 오너에 대한 충성뿐만 아니라, 일정한 가치지향, 조직지향, 정치지향으로 일렬로 내달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기자들의 충성 경쟁 과정에서 매체의 영향력을 보존할 수는 있겠지만, 기자의 존재감은 상실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거기에 위기의 본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이야기해왔던 매체의 개혁, 언론시장구조의 개혁이 핵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기자 개인’이 꿈틀거리고 생동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매체 개혁, 언론 개혁을 위해서라도 급선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자 개인의 존재감과 영향력이 급속히 추락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나 매체 심지어 자신의 도그마까지도 포함해서 그 경계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기자들이 존재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기자들이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조직, 매체를 넘어 서로 연대하고 북돋아준다면,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매체에 갇히지 않고 개인 블로그 등 대안 미디어까지 이들 기성언론의 기자들이 적극 활용하면서 서로 네트워크 한다면, 매체의 무한경쟁과 기자의 충성경쟁이라는 기존 언론의 공고한 매커니즘에도 균열이 생기지 않을까요. 거기서 비로소 한국 언론이 총체적 위기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는 '자신이 누구에게 말하는가' 생각해야



이재강 = 자화상 관련해서 기본적으로 기자가 누구에게 말하는 사람인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런 기사를 쓰고 보도를 했을 때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실제는 내가 말하는 대상이 나의 상사, 사주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피드백을 받더라도 독자나 시청자에게서 받는 피드백과 상사에게 받는 피드백의 사안의 중대성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라는 면에서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자신은 시청자와 독자를 위해 말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 기자들은 알게 모르게 조직을 위해서, 상사, 회사, 조직을 위해 말하고 있지 않나요. 그것 자체의 심각성을 모르고 문제의식도 없는 것이 일그러진 자화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기 = 이재강 기자가 중요한 지적을 하셨네요. 그게 광고주일수도 있고, 사장일 수도 있고...



김재호 = 소위 기사 작성하는 기계로 전락한 측면이 있어요. 사실 어떤 기자들은 사건이 터지면, 기계적으로 기사를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쁘니까요. 그 회사에서 지향하는 바 내가 지향하는 바,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바를 어떤 순간에는 망각하고 그냥 기계적으로 써 내려가는 측면도 있습니다.



기자들이 대학은 다 나왔으니 석사 박사, 유학파가 많지만 전반적으로 교육의 부재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지식이죠. 과연 기자가 자존심을 걸고 ‘우리는 도리를 다 해야 한다’는 교육을 한번이라도 할까라는 면에서 봤을 때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라는 직업으로 취직했을 때, 글 쓰기 재주가 탁월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다 보니 그 패턴이 익어서 기사를 잘 쓰게 된 것이죠. 그 뒤로 진정한 기자가 되는 시스템이 부족합니다. 그런 부분을 통해서 문제점을 되새김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김용길 = 학생시절, 작가인 김훈 선배가 작품비평 글을 쓰면 그 날의 필독서였고, 그것을 묶으면 글쓰기의 교과서가 됐지요. 신문 텍스트를 몇 년 지나 읽어봐도 감동을 주는 경우죠. 지금은 그런 글들이 없습니다. 즉 ‘이 사람의 칼럼과 기사를 꼭 읽어봐야지’ 하는 기대와 감동이 없어요. 과연 우리가 기사를 쓰고, 편집할 때 언제 한번 제대로 만들어 봤는가 하는 문제죠. 조금 전에 시간을 말씀하셨는데, 그렇죠 우리는 시간의 노예죠. 왜 우리는 30분 만에 일어난 사안에 30분 만에 결과를 내고 당장 경쟁시스템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문제는 독자들 자체가 이런 시간싸움의 기사정보에 별로 감흥을 받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찬찬하게 살핀 뒤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좀 더 부가가치를 투입해, 정교하게 만들어 승부수를 띄울 수는 없을까요. 또 다른 시각을 넣어서 숙성시켜 내 놓으면 기자와 독자 모두 만족을 할 수도 있는데 왜 그런 기사를 못 만드는 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뉴스를 만드는 시간을 조금 늦출 필요가 있어요. 후닥닥 날림으로 만든 기사에 대한 생명력은 스스로 알잖아요. 데스크를 설득하는 작업이 우리의 뉴스 제조 과정의 혁명인 것 같아요. 우리 자체가 기존의 뉴스제조 라인을 탈피하는 것이 근본적 숙제입니다.그렇다고 그것은 혼자의 다짐이나 객기로 되는 것은 아니지요.답은 있을 것 같은데 어려운 일입니다.



이상기 = 3년 8개월 동안 기협 회장하면서 가장 감명 받은 말은 2002년 가을에 고려일보라고 있어요. 카자흐스탄에. 거기 당시 편집국장 하시던 김성수 씨가 재외동포 기자대회에서 한 말이, 청와대에서 건배사를 한 것인데, “우리 기자들은 한 줄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사흘 밤낮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러시아 속담이라고 합니다. 진짜 무겁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기자들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면, 기자들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또 어떤 순간에 어떤 포지셔닝을 해야 하는 지 저절로 나올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기자상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란 무엇입니까?



<잠시 침묵...>



모두 = 이게 가장 어려워요.



이희정 = 기자의 정의에 대해서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것도 물론 본질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많이 변하는 잖아요. 과거에는 지사적 언론인이 전형이었다면, 지금은 멀티미디어 정보사냥꾼 뭐 이런 식으로 옮겨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자의 정의를 말하기 보다는 미래상에 대해서 말하면서 변화는 이렇게 가고 있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것은 무엇이고, 바꿔야 되는 부분은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쪽이 훨씬 더 생산적인 논의가 되지 않을까요?



기자는 정확하게 취재해서 좋을 글을 쓰는 사람



신경민 = 일제시대의 지성, 투사. 지금은 정보사냥꾼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정확하게 취재해서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일 거에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요즘 인터넷, 블로그, 포털 등 외연이 넓어지고 매체가 다양화되고 그랬지만, 그 쪽에는 너무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가지고 양산하는 짧은 글로 넘치고, 섹시하고 쇼킹한 그런 글을 쓰고 있어요.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뽑아내는 그런 저널리즘은 우리가 안 해야 되고 깊이 있고 전문성 있는 글을 쓰는 것이죠.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정확함이죠. 신속보다는 정확한 글을 쓸 수 있는 그리고 이데올로기나 회사의 방침, 광고의 압력, 정치권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취재와 글을 써야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원칙이 아닌가 싶어요.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매체가 다양화 된다고 해도 변화하지 않는 원칙, 그것은 뭐 누가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냐가 문제인데, 회사 내외의 제문제가 따르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요즘 요구하는 것은 전문성, 재교육이냐, 개인의 노력이냐의 문제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언론사 간부 입장으로 말하면, 노조가 생기면서 변화되는 것들이 많은데, 지금까지 내 고과를 못 봤어요. 근데 승진해서 보니 내 고과에 수도 있고 양도 있고 엉망이더라고요.. 나는 똑 같은 나인데, A+에서 C, D까지 있어요. 원래 그런 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승진하다 보니 신경이 쓰여요. 반면에 요즘 후배들을 보면 너무 평가에 민감합니다. 노조가 생긴 후 자기 평가에 있어 민감해 “왜 내 점수가 이거냐?”등의 문제 제기를 많이 합니다.

저 같은 경우 부당한 취재지시 및 데스크가 기사를 고쳤을 때 저는 그것에 저항했지만, 요즘은 그것이 줄어드는 경향이 많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기 = 데스크의 부당성과 싸울 자신이 없는 사람이 독자들에게 어필한다는 것은 모순되는 상황인 거죠.



이희정 = 기자개개인의 문제로 치환될 수는 없다고 봐요. 사회가 혼돈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기자들이 과거보다는 일하기가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죠. 독재시대에는 일하기가 어찌 보면 쉬울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 때 자신을 던졌던 기자가 지금에서 잘 할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혼돈 속에서 개개인이 준비나 고민할 수 있는 시간도 없이 사회가 변하기 때문에 기존 생산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는 것 아닐까요?



지금은 멀티미디어화라든가, 온오프 통합 조직을 만든다든가, DMB까지 광범위한 미디어 통합에 대해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그걸 봤을 때 기자들은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합니다. 기사를 쓰고 사진을 찍고 심지어 영상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인데요. 마감에 대한 압박까지 있어 더 많은 업무로드가 생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생매체와 기존매체를 구별하려면 다시 기획탐사에 치중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와요. 지금 저희 회사에서도 기자도 요구하고 회사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인데요. 답을 찾을 수가 없어요.



또 기자의 하루를 시나리오로 만들어보면 이것은 거의 하루에 2~3시간 자고 일해야 실현할 수 있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자협회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경민 = 기자가 멀티플레이어라는 것에 대한 미국의 상황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많은 매체를 한 명의 소유주가 가지고 있어 기자는 기사 쓰고, TV에도 출연하고, 주간 잡지까지 맡아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USA투데이’의 경우도 기자가 기사도 쓰고, 방송 리포팅도 하고 있어요. WP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이미 그런 멀티플레이어화가 시작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가도 있습니다. 자본만 투자하면 대책이 있을 지 없을 지 모르지만 대세죠. 진실과 정확한 기사를 써야 하면서 멀티플레이어로서의 양적인 것까지 요구하는 상황이라면, 기자는 말 그대로 수퍼맨, 수퍼우먼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이희정 = 항간에는 기자라는 직업이 이미 3D 업종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러다가 기자 하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상기 = 아직은 많이 있다고 보여요. 요즘도 기자에 대한 선호가 높다고 봅니다.



신경민 = 끝으로 콜로키엄에 대해 한마디 하죠. 우선 언론계 전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우선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참석자 풀을 만들어 사안 별로 자리를 갖고 토론 하는 방향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이슈가 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기자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라는 것도 새로운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기 = 오늘 이 자리가 한국 언론과 기자 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뒷받침이 될 수 있는 자리가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기자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고민이 계속 이어져야 하고 여러분들이 말씀 해 주신 것처럼 한국사회에서의 기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갖춰야 할 철학이 뒷받침되는 자리를 계속해서 만들 것을 약속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