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에만 집중…본질 사라져
버지니아공대 참상 국내언론 보도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 | 입력
2007.04.25 15: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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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언론의 버지니아공대 총기 참사 보도에 대해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사진은 범인 조승희씨가 양손에 권총을 든 사진을 보도한 주요 신문들의 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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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다중적 정체성’ 인식 부족
자극적·선정주의적 보도 지적도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살인 사건은 전세계에 충격을 몰고 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국내 언론의 보도는 적절치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혈통주의·민족주의적인 보도가 총기 참사를 불러온 구조적인 문제를 가렸다고 보고 있다. 자극적이고 선정주의적 보도 태도도 적지않았다. 범인의 가족에 대한 개인정보가 드러나는 등 언론이 지켜야 할 인권 보호의 기준도 다시한번 제기됐다.
국내 주요 언론은 17일 미국 현지에서 범인이 한국계라는 발표가 나오자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자성론’과 ‘반성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19일자 한양대 홍성태 교수(경영학)의 시론 ‘조승희 개인 문제라고 하지만…’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사과를 제안했다. 이 시론은 “미국의 주요 방송에 진솔한 사과와 유감을 나타내는 광고라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19일자 주요 신문들은 1면 머리로 버지니아 공대의 추모식을 알렸다. 조선일보는 ‘버지니아의 비극, 한국의 가슴도 적시다’라는 통단의 기사를 내보냈다. 중앙일보는 ‘레츠고 호키스…우리는 슬픔을 이겨낸다’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와 함께 임직원 일동의 이름으로 희생자를 애도한다는 박스 광고를 내보냈다. 동아일보는 희생자들의 개인사진을 모두 1면에 실었다. 해마다 1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는 총기살인의 근본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총기산업,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문제 등은 주변부로 밀려났다. 범인의 국적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미국 언론이나 현지인들의 반응과는 대조를 이뤘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들은 우리나라의 문화와 언론이 개인의 다중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범인 조승희씨는 대부분의 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미국에서 거쳤으므로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혈통만 갖고 한국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한 개인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양대 박찬승 교수(사학과)는 “21세기 글로벌 사회에서는 다중적 정체성을 가진 개인이 더욱 많아질 것”이라며 “그러나 우리 사회나 언론은 아직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이는 국내에 늘고 있는 이주노동자나 국제결혼 현상을 볼 때 사회문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보도 태도가 아쉽다고 목소리를 모은다.
언론의 민족주의적 접근과 대외적 태도에 대한 비판도 있다. 범인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한국인들의 공동 죄의식으로 만드는 데는 집단의식으로서 민족주의가 작동됐다는 것이다. 성균관대 윤해동 교수(동아시아학술원)는 “일단 집단의식으로서 민족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게다가 강한 집단에 대한 눈치보기식 현상으로 나타나 더욱 씁쓸하다”고 말했다.
선정주의적인 보도도 적지 않았다. 한겨레, 한국일보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일간신문들은 20일자 1면에 양손에 권총을 든 조승희씨의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 없이 1면 머리로 실었다. MBC 뉴스데스크는 19일자 방송에서 조씨의 살인 과정을 컴퓨터 슈팅게임 장면을 연상시키는 그래픽으로 보도해 눈총을 받았다. 조선일보는 20일자 기사 ‘너무 다른 누나’에서 범인 조씨 누나의 실명과 소속 등 개인정보를 공개해 논란을 불렀다. 조선은 24일 미디어면에 “조승희의 유가족도 또 다른 피해자인데 이미 미국언론이 보도했다는 이유로 누나의 실명과 얼굴, 직장을 모두 공개한 것은 두고두고 생각해볼 문제”라는 언론학 교수들의 지적을 실었다. 전문가들은 외신에 먼저 나왔다는 사실이 책임을 줄여주지는 못한다며 “외신도 나름의 잣대를 갖고 해석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숭실대 김사승 교수(신문방송학과)는 “국내 언론은 구조적 접근보다는 관심을 끌만한 단순한 사실을 쫓아가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선정적 보도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며 “사회적으로 충격을 준 사건을 보도할 때 전형적으로 보여준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